사진<공수>님의 블로그에서
유혹 / 보들레르
또는 에로스, 플루토스, [명예]
간만에, 거만한 두 [악마]와, 그에 못지않게 괴이한 [마녀(魔女)] 하나가, 신비로운 계단을 올라왔다. 이 계단을 통해
[지옥]은 잠든 인간의 약점을 찌르고 그와 교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연단에라도 서 있듯이, 내 앞에 와서 당당히 서 있는 것이었다.
이 세 마귀의 몸은 유황빛 광휘를 방사(放射)하고 있엇으므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뚜렷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도 고결하고 하도
위엄차 보였으므로, 나는 처음에 그들 셋이 모두 진짜 [신]인 줄 알았다.
첫째 [악마]의 얼굴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애매하였고, 그
몸뚱이의 선(線)에는 또한 고대의 박카스와 같은 연약함이 있었다. 그의 시름겨운 고운 눈에는 침침하고 흐릿한 빛이 감돌아, 소낙비의 눈물에
아직도 무겁게 젖어있는 오랑캐꽃과도 같고, 방긋이 열려 있는그의 입술은 향로(香爐) 같았다. 그리고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사향(麝香)냄새
풍기는 곤충들이 뜨거운 입김 속에 날아다니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의 자줏빛 윗도리 둘레에는, 허리띠처럼, 아롱거리는 뱀 한 마리가
둘러 있었는데, 대가리를 쳐들고, 그 살아 있는 허리띠에는 불길한 음료(飮料)가 가득 들어 있는 별과, 번득거리는 칼과, 외과 가구들이 번갈아
매달려 있었다. 오른손에는 또 하나의 병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무슨 번쩍거리는 붉은 것이 들어 있었고, 다음과 같은 괴상한 말이 표박지에
씌어 있었다.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 최선의 강심제(强心劑).] 또 왼손에는 바이얼린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그의 쾌락과 고통을
노래하고, 악마들의 향연의 밤에 그의 열광을 주위에 퍼뜨리는 데 쓰였을 것이다.
그의 가냘픈 발목에는 끊긴 황금 사슬의 고리가 아직도 몇
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발 돌리기가 거북하여 할 수 없이 땅 쪽으로 눈을 내려뜨려야 할 때에는, 그는 잘 가공된 보석처럼 미끈하고
반짝거리는 자기 발가락을 자랑스럽게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비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에서는
사람을 호리는 듯한 도취의 빛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였다. [네가 원한다면, 만약에 네가
원한다면, 너를 여러 넋들의 왕자로 만들어 주마. 그리고 너는 조각가가 마음대로 찰흙을 다룰 수 있는 이상으로, 살아 있는 물질을 마음대로
다루게 되리라. 그리고 또 네 자신에서 벗어나 타인 속에 너를 잊어버리고, 남들의 넋을 끌어당겨 네 넋과 융합하도록 하는, 끊임없이 재생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나는 대답하였다. [참 고마운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시시껍질한 인간 따위는 나에게 필요가 없다. 아마 이
가엾은 내 자아(自我)보다도 더 쓸모 있는 건 못 되리라. 하기야 나도 회상하기에 부끄러운 것이 없지는 않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이 늙은 괴물아, 너의 그 신비스런 칼과, 그 수상쩍은 병과, 네 발에 매여 있는 그 쇠사슬들은,
네 우정이 신통한 것이 못 된다는 걸 꽤 명백하게 설명해 주는 상징이 아니겠는가! 선물은 그냥 넣어 두어라.]
둘째 [악마]는 그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표정도 없었고, 그 간사스런 미태(美態)도 없었고, 그 섬세하고도 향기로운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것은 눈이 없는 커다란 얼굴을 가진 거인으로서, 그 불룩한 배지는 허벅다리 위까지 축 늘어져 있었으며, 그 살갗에는 온통 금물이 칠해져 있고,
문신(文身)처럼 이 세상의 비참이란 비참을 온갖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굼틀거리는 조그만 얼굴들이 무수히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자진해서
못에 매달려 있는 피골이 상접한 조그만 사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떨리는 손보다도 그 애원하는 듯한 눈이 더욱 잘 적선을 구하고 있는, 여위고
기형적인 난장이들도 있었고, 게다가 또 쪼그라진 젓퉁이에 매달린 조산아를 안고 있는 늙은 어미들도 있었다.
뚱뚱한 악마는 주먹으로 그
거창한 배때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즉 거기서는 금속성의 소리가 기다랗게 울려 나오더니, 무수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된 어렴픗한 신음소리로
변하여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악마는 그 벌레먹은 이빨을 뻔뻔스럽게 드러내 놓고, 바보처럼 큰 소리로 껄껄 웃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진수 성찬을 잔뜩 먹고 난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궐자는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의 가치가 있는 것을,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그 기괴망측한 배때기를 두드리니,
그 은은한 메아리 소리가 그의 야비한 말에 주석(註釋)을 붙여 주는 것이었다.
나는 불쾌하여 얼굴을 돌리고 대답하였다. [나는 내 향락을
위해 남의 비참을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네 피부 위에 벽지처럼 그려져 있는 온갖 불행에 의해 서글퍼진 그런 부귀는 원하지
않는다.]
마녀(魔女)로 말하자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그녀한테서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는 걸 고백하지 않는 그녀한테서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는 걸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 매력을 정의기 위해서는, 이미 인생의 내리받이에 들었지만 아직 늙었다고는
할 수 없고, 그 아름다움은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하자면 폐허의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다고나 할 그런 미인의 매력에 비할 수 밖에 다른 더
좋은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그녀의 태도는 교만함과 동시에 어색스러워 보였으며, 그 눈에는 푸르스름한 무리가 생겨 있었지만, 매혹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에게 세상에도 감미로운 최저음(最底音)의 가수를 회상케 하였다.
하기야 끊임없이 브랜디로 씻겨진 목구멍의 쉰 목소리가 다소 느껴지기는 하였지만.
[너는 내 힘을 알고 싶은가?]라고 이 가짜 여신은 그
매력적이고도 역설적(逆說的)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 들어 보아라.]
그러면서 그녀는 세계의 신문이란 신문의 표제(表題)를 모조리
갈대피리처럼 돌돌 감아 놓은 엄청나게 큰 나팔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 나팔을 통하여 내 이름을 외치니, 내 이름은 수만 뇌성 소리로
울리어 공간을 굴러갔다가, 가장 먼 유성(遊星)으로부터 메아리치며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제기랄! 이거야말로 희한하구나!]하고
절반 정복되어 나는 외쳤다. 그러나 더 잘 주의하여 이 매혹적인 여장부를 살펴보니, 그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건달들과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본 듯한 그런 생각이. 그리고 그 놋쇠 나팔의 쉰 목소리는 내 쉬에 무언지 모를
매음(賣淫)의 나팔을 회상케 하였다.
그래서 나는 멸시감에 가득 차 대답하였다. [꺼져라! 나는 이름도 부르기 싫은 놈들의 정부(情婦)와
결혼할 그런 사람이 아니다.]
확실히 이토록 용감하게 거부한 것을 나는 자란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잠이 깨었고, 온
몸에서 힘이 쑥 빠졌다. [정말,]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토록 신중하게 군 것을 보면 나는 퍽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구나. 아!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 그들이 다시 한 번 와 준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부르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의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파렴치한 짓이라도 하겠노라고 제의하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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