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미술에서는 언제나 여성의 누드가 반복되어 중요한 주제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이른바 인류 최초의 미술품이라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부터
인도의
사원에 새겨진 조각들, 아프리카의 민속 조각에 이르기까지 온통 누드 투성이 입니다.
점잖으신
우리의 조상님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혜원 신윤복님의 나체화는 그 익살로
우리에게
잔잔한 미소를 줍니다.
그
많은 것을 놔두고 하필이면 왜 여성의 벌거벗은 모습일까요?
여성의
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일까요? 글쎄요....... 그런 생각을 함부로 이야기 떠벌이다간
난봉꾼
소리 듣기에 딱 알맞지 않을까요?
사실
서양에서도 처음부터 여성의 알몸이 예술의 소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만 보아도 여성의 누드는 예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원전 수 세기부터 남자의 누드상은 흔히 만들어졌지만, 여자의 누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비너스의 조각상들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폴론 등 남성의 신상은 거의 모두가 알몸의 상태입니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의 모습이나 성서에 등장하는
이브
정도였지, 여염집 여인네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리거나 만든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풀밭
위의 식사 >1863 마네Edouard Manet 켄버스에 유화 400x306cm 인상파
미술관
1863년,
마네라는 청년이 결국은 사고를 치고야 말았습니다.
이웃의
여인네가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에서 허연 엉덩이를 드러내고 정장 차림의
근엄한
신사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싸구려
냄새가 풀풀 나는 원색에다가 명암법은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는지 그저 평평하게만 보이는
그림을
그리곤,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이
얼빠진 화가는 같은 해에 열린 프랑스의 국전 ‘살롱’에 그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무얼 했는지 입선된 그림보다 떨어진 그림들이 더 괜찮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소란이
계속되자, 할 수없이 떨어진 그림들을 따로 모아 ‘낙선자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여는
우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의
열혈청년 마네의 그림은 당연히 낙선작 중의 낙선작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사실
이런 이상한 그림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몇몇 젊은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괜찮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그의
화법을 흉내 내는 화가들이 하나둘 늘어가더니 그들 끼리 모임을 만들어 전시회까지 열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비웃던 그들이 바로 인상파입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임이 됩니다. 돈푼깨나 만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줄을 잘서야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여성의 나체를 그리는 것은
그것을
그리는 남자화가가 여성의 알몸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의
욕구가 신화와 예술 속에 몸을 가리고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화가들이 모두 여자라면 덜렁거리는 남자의 알몸이 가장 아름답다며 추켜세웠을 지도 모릅니다.
마네에
의해 이 위장된 욕망이 처음 폭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비난을 퍼 부으면 스스로의 속내가 감추어 질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네가
사람들에게 용납되기 시작했을 때 이탈리라 출신의 미남 청년 모딜리아니는 여성의 벌거벗은
누드에
치모를 버젓이 그려 넣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최근의 일 입니다.
이전의
나체화가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인도,
페르시아, 아프리카의 전통예술에서는 여성의 누드가
서구의 그것처럼 수동적이고 허위적이지
않습니다.
인도의
힌두 여신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이고 활발한 성행위를 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페르시아와
아프리카의 여인들도 당당하게 그들의 모습을 뽐냅니다.
<장미빛
누드> 1917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켄바스에 유화 60x92cm 개인소장
현대에
와서 누드화의 전통은 포르노라는 얼굴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대부분 우리에게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 적나라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여성을
주체 의식이 없는 성적 대상물로 취급하고 그러한 생각을 강요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에는
포르노보다 더 적나라한 노출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곳에는 포르노와 같은 거짓과 위선, 남성우월주의가 숨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투나상>
칸다리아 마하디브 사원의 벽면
조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