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12월의 말 /이어령

자크라캉 2006. 3. 14. 20:41

 

   12월의 말

 

   - 다시 밭을 가래질하며

 

   이어령

 

 

 

   영어의 Verse는 詩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어원을 살펴보면 동시에 그것은 '가래질'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부가 밭을 가는 것과 詩人이 詩를 쓰는 행위가 어찌하여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그 상징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흙은 산화하여 굳어 버리고 表土의 양분은 농작물에 의해서 다 흡수되어 버린다. 밭을 그대로 두고 이제 새 곡식과 채소를 심을 수 없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고 있다.

 

   나락을 거두고 채소를 다 캐고 나면, 새해를 위해서 농부는 쟁기질을 한다. 흙을 뒤엎는 것이다. 안에서 침묵하고 있던 흙을 겉으로 들어내고, 겉의 흙들을 表土 깊숙이 다시 잠재운다. 새 흙과 헌 흙을 반전시킨다.

 

   이렇게 해서 농부의 밭은 다시 새로워지고, 그 변혁된 흙에서 새로운 씨앗들이 돋아날 수가 있다.

 

   詩人은 우리들 체험의 밭을 간다. 詩를 쓴다는 것은, 가래질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나날들 속에서, 우리의 生은 산화되고 굳어 버리고 양분을 소실해서 불모지가 되어 간다. 어제 보던 벽, 변화 없는 길, 우리는 그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경로로 하루에 도달한다. 피로하고 권태로우며 기계적인 일상의 그 체험들은, 마치 늘 보는 간판의 文字들처럼 판에 찍혀 버린 것들이다.

 

   生의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生은 이슬이 맺힌 싱싱한 배추밭이나 이랑을 덮는 5월의 보리밭처럼 신선하지 못할 것이다. '잘 잤느냐'고 '밥 먹었느냐'고
'또 보자고'...... 늘 같은 인사말처럼 하루가 오고 하루가 지난다.

 

   詩人은 이 밭을 쟁기질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밭의 흙을 뒤엎어서 새 흙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일상의 흙에 쟁기질을 해서 이제껏 깊숙이 침묵하고 있던 흙들을, 검고 살진 흙들을 끌어내는 지혜를 알고 있다.

 

   詩人은 농부처럼 빈 밭을 간다. 새로운 계절에 대비하여 씨앗을 뿌리고 채소를 심기 위해서, 그래서 生의 풍요한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먼저 가래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가래질 속에서만 生은 하품을 하지 않고, 팽팽한 경작의 긴장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 이어령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