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06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

자크라캉 2006. 2. 22. 10:37

200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불가리아 여인

 

 

이윤설

 그림 남궁 산·판화가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심사평]

"삶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빛나는 예지"…심사평유종호·신경림
 ◇유종호(문학평론가·시인·왼쪽), 신경림(시인)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의 시가 많은 것은 같은 세대가 같은 정서, 같은 생각에서 살고 있는 데 연유하는 바도 없지 않겠으나, 한편 시를 잘못 공부하고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 잘 읽히지 않는 시도 많았지만,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시가 예년에 비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윤설의 시들이 단연 빛난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불가리아 여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을 열고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이국 여인을 본다는 것이 시의 내용인데, 그를 불가리아 여인으로 상정한다든가 또 그의 위치에서 창 안의 나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설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시가 전체적으로 지극히 발랄하고 싱싱하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또 ‘성난 여자’에서는 활기와 거침없는 서술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가 재미가 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점도 미덕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에서는 황현진의 시도 뒤지지 않는다. ‘당신과의 드라이브’나 ‘당신에게 키스를’ 같은 시는 시라면 으레 심각하고 어렵다는 개념을 바꿔 놓는다. 한데 어딘가 한구석 덜 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김종분의 시들은 조금 구투라는 느낌을 준다. ‘나는 불량 농민이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잘 읽히지만, ‘나는 구술 면접을 잘 볼 자신이 없다’ 같은 시는 지루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이만큼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있어 그의 시들은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사람의 작품 중에서 이윤설의 ‘불가리아 여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쉽게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