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심은섭
나는 그 꽃 속에 가만히 누워본다 무명저고리를 입은 한 노모의 무릎을 베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생이 바다에 다다를 때까지 꽃다운 꽃을 한번 피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꽃은 지문이 다 닳은 손으로 나의 사주를 수선해 주었다
비록 허기로 펄럭이며 세상 밖을 기웃거리는 씨방의 씨앗들이지만 밥상에 보리개떡 한 조각을 놓고 곁눈질이 치열한 광경에 꽃은 가마솥에 맹물을 끓여보았다 그러나 내장은 여전히 빙하의 계곡을 통과하지 못하는 날들이 즐비했다
꽃 속에 누워 있는 동안 바람이 몹시 불었다 새벽마저 연착되었다 꽃은 미풍에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베토벤의 베르디 행진곡을 불렀다 그날, 씨앗들을 정장차림으로 담장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스스로 오십 원에 거래되는 것을 보았다
-2020년 『동안』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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