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최남선은 근대화 꿈꾼 문명(文明)주의자"

자크라캉 2010. 5. 10. 23:55

"최남선은 근대화 꿈꾼 문명(文明)주의자" -20091223,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09/12/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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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

六堂연구학회, 재조명 세미나
"제국주의로부터 살아남으려 계몽 통한 근대국가 원한 것
삼국유사 등 한국학 서적 발굴… 비판에 업적·본의 묻혀선 안돼"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최초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됐고, 최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다. '친일(親日) 지식인'이란 낙인은 학계의 연구에도 영향을 끼쳐 학자들도 최남선에 관한 연구를 꺼려온 것이 사실이다.

최남선 사후 50년인 지난 2007년 창립된 육당연구학회(회장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구소(소장 이지순)와 함께 22일 개최한 《비교문화·비교사상사 텍스트로서의 '육당'》 학술대회는 최남선을 '근대 문명'과 '민족'을 고민한 지식인으로 다시 조명하는 자리였다. 김용직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서구의 충격과 함께 시작된 한국 근대의 과제는 '반제(反帝)'와 '반봉건(反封建)'이었다"며 "최남선이 '반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희석시키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반봉건'에서 놀라울 정도로 큰 역할과 힘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최남선은 조선학 연구가 속수무책이었던 시대에 삼국유사 등 30종 이상의 한국학 관계 서적을 발굴한 민족 근대화의 대지주(大支柱)였다"고 평가했다.

최남선의‘조선민족본지도’(왼쪽)와 서양의‘인식의 나무’. 지식을 모으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인식을 구성하는 동일한 사유를 보여준다.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최남선은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지식인들처럼 지식의 모든 가지에 해당하는 총체적 대상을 섭렵하려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최남선이 분류한 '조선민족본지도(朝鮮民族本支圖)'와 백과전서파의 '지식의 나무'는 모두 분류하기를 바탕으로 한 작업이었다"며 "최남선이 조선의 '콩쥐 팥쥐'와 서양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비교한 것은 우리 민족과 조선이 타자(他者)와 구별되기를 바라는 목적과 염원이 녹아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최남선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약했다는 말은 차후적인 소급 속에서나 가능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민족을 계몽해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출애굽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데 조선의 전통적인 예(禮)와 의(義)에서 근대를 만들 동인(動因)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을 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문이다.

지식인 연구공간인 '수유너머 남산'의 문성환 박사는 "최남선은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는데 그를 향한 가장 커다란 비판이 민족을 배반했다는 데 있다는 것은 역설(逆說)"이라면서 "근대화는 일차적으로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식민지 조선의 경우 근대화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경영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서구화와 일본화라는) 복수(複數)적인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학술대회 참가자들은 최남선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자산으로 계승할 것조차 버려서는 안 된다는 데에 인식을 함께했다. 토론에 나선 임상석 원광대 연구교수는 "최남선은 식민지 체제 바깥에 궁극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실존은 현실적 체제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러나 최남선은 민족주의 형성과 국민문학을 추구했고, 그가 만든 문화기관과 매체 등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다양한 지식인들을 아우르는 '허브'로서 자리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