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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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1941년 11월 20일.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 이름 붙인 미간 시집 첫머리에 놓을 ‘서시’를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순 깃븜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2년 1월 24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려 했던 시인은 두 달 만에 ‘참회록’을 썼다. 닷새 뒤, 연전 학적부는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라는 일본식 씨명으로 시인이 개명했음을 적고 있다.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할 ‘그 어느 즐거운 날’, 해방의 그날이 ‘내일이나 모레’ 오래지 않아 올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뼈저린 욕됨을 달게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독립을 위해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연구로는 부족하다.” 일 년 반 뒤 사상범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 진술한 유학 동기가 잘 말해주듯, 그때 스물네 살 청년은 일본 유학을 위한 “도항(渡航)증명서”를 얻기 위해 욕됨을 감수하고 창씨개명을 했다. 그해 4월 2일. 시인은 기독교계 릿쿄(立教)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낯선 도쿄에서 외로움과 싸우던 시인은 그해 가을 사상적 동지 송몽규가 다니는 교토제국대학 인근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겨갔다. 시인은 독립운동을 이유로 다음 해 7월 동무와 함께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재학 당시로부터 사상적으로 서로 공명했을 뿐 아니라 꼭 같이 민족의식이 두드러졌던 윤동주와 회합을 했고,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조선문화의 유지 향상에 힘쓰고 민족적 결점을 시정하는 데 있다고 믿고 스스로 문학자가 되어 지도적 지위에 서서 민족적 계몽운동에 몸 바칠 것을 협의했다(『특고월보』, 1943. 12).” 해방을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에서 생체실험 대상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시인은 27년2개월의 짧은 삶을 비명에 마감했으며, 한 달 뒤 송몽규도 동무의 뒤를 따랐다. 그때 민족의 역사와 말 국혼(國魂)을 지키다 죽은 두 사람의 정신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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