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시인

'조선의 로트렉' 구본웅과 동행 -20100223,조선일보

자크라캉 2010. 5. 10. 23:37

'조선의 로트렉' 구본웅과 동행 -20100223,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2/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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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가슴을 두드러지게 강조한〈여인〉(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구본웅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상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이다. 이상은 여덟 살 되던 해에 서울 누상동에 있는 소학교인 신명학교(新明學校)에 들어갔는데, 이상보다 네 살 연상인 구본웅도 같은 해에 입학했다. 세 살 때 마루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어 몸이 쇠약했기 때문에 입학이 늦어졌던 것이다.

구본웅은 경신고보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의 세계에 입문했다. 구본웅이 경신고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상도 바로 이웃한 보성고보에 다니며 그림에 빠져들었다. 구본웅은 토요일에는 서양화로 일가를 이룬 고희동(高羲東)이 이끄는 YMCA의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그림을 배웠는데, 그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사람에 장발(張勃) 이제창(李濟昶) 안석주(安碩柱) 등이 있다. 그는 1925년부터는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밑에서 사사하며 회화와 함께 조각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7년 5월 열린 제6회 조선미전(朝鮮美展)에서 〈얼굴 습작〉이란 조소로 특선에 올라 화단의 주목을 받은 구본웅은 이듬해 도쿄로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다음 해 봄 일본대학 예술전문부로 옮겨 졸업했다.

1920년대 일본 화단은 후기인상파의 유습을 청산하며 마티스와 루오로 대표되는 야수파 운동이 크게 유행했다. 구본웅 역시 이런 일본 화단의 영향 아래에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강렬한 원색을 쓰며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야수파적인 흔적은 이상이 개업했던 '제비' 다방의 한쪽 벽면에 걸린 구본웅의 나부(裸婦) 그림에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1931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양화가(洋畵家) 구본웅 개인미술전람회(個人美術展覽會)〉를 열었다. 신문에는 구본웅을 두고 "수년 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을 출품하여 특선된 일이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제전(帝展), 이과전(二科展), 독립전(獨立展), 태평양전(太平洋展) 등에 출품하는 대로 다 입선이 되어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로 소개했다. 50점의 작품을 내놓은 이 개인전은 큰 성공을 거두고, 이때부터 구본웅에게는 '조선의 로트렉'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은 각별했다. 1933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이상은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하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휴양을 떠났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이 구본웅이었다. 구본웅은 1935년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이상을 모델로 〈우인(友人)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이상이 경영난으로 '제비'의 문을 닫은 뒤 새로 인수한 인사동의 카페 '쓰루' 경영에도 실패하는 등 연이은 사업 실패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구본웅은 아버지 구자혁이 경영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彰文社)에 친구의 일자리를 만들어 밥벌이를 하도록 도왔다. 1936년 10월 이상이 그토록 갈망했던 도쿄(東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구본웅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비' 다방이 파산하고 집달리가 기물들을 거리에 내놓고 건물의 출입구를 봉쇄하기 직전,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이상의 십 호짜리 '자화상'을 떼어내 자기 화실로 옮겨 보관한 이도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소설 〈봉별기〉에 나오는 K군이 바로 구본웅이고, 일본어로 쓰인 시 〈且8氏의 出發〉도 구본웅에게 바쳐진 작품이다. 그동안 해석이 분분했던 '且8氏'가 '具(구)'자를 파자(破字)한 것이고, 이 시에 언급된 '곤봉'은 남성 성기를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화를 그릴 때 쓰는 붓의 환유임을 국문학자 권영민은 밝혀냈다. 이 해석에 따르면 〈且8氏의出發〉은 '성적 표상의 새타이어'가 아니라 육체의 불구라는 장애를 딛고 '산호나무'와 같이 조선의 화가로 우뚝 일어선 구본웅의 빛나는 성공을 기린 작품이다.

화가 이승만의 증언에 따르면 구본웅은 이상이 그림을 그렸더라면 화가로 대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어쨌든, 이상은 천재였어"라고 자주 이상의 천재성을 안타까워하며 먼저 세상을 뜬 친구를 그리워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