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정든 유곽에서/ 이성복

자크라캉 2009. 11. 23. 16:29

 

사진<Cigarette Alcoho(⑮+)>님의 카페에서

 

 

든 유곽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蘭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 계간 <문학과 지성> 197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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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평.1]

 

 30년도 더 지난 이성복 시인의 등단작인 이 작품에서 얼른 그 감상의 '깜'을 건져 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느 시인이 '시적 창조는 해독할 수 없는 신비'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다시 읽어보면 '누이가 듣는 음악'에서 부터 '나의 별'우리 한족의 별'까지의 거리는 그래도 아득해 보이지만 '엘리'라는 낯선 이름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신비와 함께 시 전반에 흐르는 모종의 심상찮음을 감지할 수 있다.

 

 시대와 민족의 상처가 읽혀지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정신대'로 끌려간 우리들의 '누이'인지 동두천 기지촌의 '누이'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은 종로3가나 청량리의 유곽을 그려 넣었다 해도 상황은 크게 어긋나지 않아 이 시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다만 거대한 상처로 뭉뚱그려 기록될 뿐이다.

 

 물론 상징의 의미를 확장시켜가면 한반도 전체의 공간이 겉만 번드레하고 안은 병든 유곽으로 표상된 그림도 보인다. 목단으로 상징된 중국의 세력이 시든 근대사 공간에서 창녀화된 한반도가 벌목당하여 거듭 죽어도 시인의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 자신이 그 상처들 곁을 쉬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떠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뒤표지를 보면 좀 더 선명해진다. "인간에게 아픔이란,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조난 신호이다. 그리고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안다는 것은 비록 치유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를 가능케 하는 첫 단계가 된다.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고통이라 불리는 도시’의 한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음을, 살아야겠음을 드러내는 징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남보다 먼저 아파하고, 남보다 늦게까지 아파하며, 아픔을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들쑤시는 자이다."

 

 그런 것 같다. 이성복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아파하고, 늦게까지 아파하며, 아픔을 잊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상처를 들쑤시는 시인인 것 같다. 시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들 비좁은 성대로는 발성할 수 없는 것들을 그는 그의 다른 초기 시들에서 자주 보여주듯 무차별적인 언어 학대와 우상 파괴를 일삼으면서 거침없이 독자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시인의 거친 호흡으로 기록된 언어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을 들쑤시고 괴롭혔으며, 많은 독자와 시인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를 의식하지 않고 80년대에 시를 쓰고 시를 얘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겠나 싶다.

 

 물론 90년대를 지나 최근의 시에서는 많은 변화가 읽혀지는데, 평자들은 이러한 변모를 '치열한 시정신의 퇴행'이라 하기도 하고, '투쟁의 몸짓에서 화해의 몸짓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시인이 그동안 발표했던 대개의 시들은 다른 시인의 시와는 사뭇 다르게 단순한 독법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묶은 그의 시집들은 끊어지는듯하면서도 서로 이어지는 어떤 인식의 힘이 개입되어있으며, 그 인식의 기저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고 그는 고백한다.

 

 우리들의 욕망은 저 롯데백화점과 대백플라자 안에 진열되어있고, 신념은 늦은 밤 텔레비전의 100분 토론과 시사토크쇼에 널부러져 있듯이, 사랑은, 우리의 사랑도 저 옐로우하우스에, 미아리에, 청량리에, 완월동에, 자갈마당에, 역전 빵골목 그 벽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이의 연애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아름답지는 않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성복의 시편들은 끊임없이 사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괘도 위를 오가며 건너뛰며 지워가며, 우리의 물음에 온 정신을 뒤척이면서 사랑의 탐구 과정을 보여줄 뿐 실천론이 앞장서 있지는 않다. 가령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숨길 수 없는 노래)라고 한 것처럼.

 

 출처 : <시 하늘 통신>님의 카페에서

 

 

[시평.2]

佛文學을 전공한 李晟馥이 77년 『문학과 지성』겨울호에 쓴 글이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음험하던 維新의 그림자가 서서히 옅어지던 시기였다. 이성복은 작고한 평론가 김현에게 詩를 건넸다.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안고 물어물어 김현의 연구실에 찾아간 것이다. 그때가 77년 여름이었다. 김현은 그 중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 두 편을 가려 그해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실었다. 이성복은 『이성복 문학앨범(웅진출판)』을 통해 두 편의 시와 다른 시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 두 편을 제외한 시들은 초현실적이고 다이나믹하고 섹슈얼하고, 딜런 토머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습이었다” 

  이 시는 1980년 10월 文知가 펴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실렸다. 원래 시집의 재목을 『정든 유곽에서』로 정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지를 이끌던 김병익 선생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고집했다고 한다. 

  「정든 유곽」은 당시 ‘관습 평단’의 기대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別種이었고 충격이었다. 오죽하면 ‘그에 대한 마땅한 비평적 척도가 없다(박덕규)’는 말이 나왔을까. 그의 시어들은 ‘나아갈 수 없는 모든 지경을 절개지의 형상(이경호)’과 닮아있거나, ‘괴상한 이미지들이 숨가쁘게 변주되도록(정과리)’ 꾸며져 있었다.

   삶의 풍경들은 느닷없이 해체되고 훼손되며 일그러져 낯설기까지 했다. 그의 언어는 방법적인 ‘파괴적 조합’을 지향했다. 일종의 뒤틀림의 美學이라고 할까. 비어와 속어, 역설과 반어가 출몰한 끔찍한 언어에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 등 親權者를 향한 욕설까지 등장한다. 維新에 대한 나름의 모더니즘式 저항이었다. 

  80년대 시를 좀 읽던 文友들은 이성복의 시에 자연 매료됐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빠져 들었고, 초현실주의 같은 시어의 파괴적 조합에 젖어들기도 했다. 특히 그의 시들은 현실을 <파괴된 삶의 풍경(언어)>으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가르쳤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그해 겨울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나는 그(김수영)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왔고, 배우고 공유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 진실이 사회적 공동체적 진실로 한정되고 배타적으로 수용될 때 나는 목이 죄는 듯한 거북함을 느낀다. 그러나 문학이 어차피 한 시대를 함께 겪어 나가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삶의 어쩔 수 없는 오열이라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한마디로 ‘김수영’이면서도 그와 ‘다른 김수영’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후 이성복은 철저히 '다른' 김수영을 지향했다. 배반의 김수영을 꿈꾼 그는 실제로 김수영과는 너무 먼 길을 갔다. 86년 그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을 통해 그는 『뒹구는···』에 젖었던 독자(文友)들을 철저히, 그리고 냉혹하게 배반한다. 독자들을 분하게 하고 억울하게 만들었고, 문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문우들은 "이성복이 변절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남해 금산』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성복은 아랑곳없이 제 갈 길로 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처: <별의 정거장>님의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