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바캉스 / 심은섭
삭풍이 수은주를 빙점아래로 밀어 내는 오후
성에가 유리창을 핥으며 햇살을 거부하는
백상어 아가리 같은 1004호 병실
바캉스를 떠날 줄무늬 가운을 입은 한 사내가
문을 들어선다 함께 따라 오며
청진기가 뱉어낸 말을 사내에게 들려 주던
여인의 어깨가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서 떤다
창틀이 갇힌 유리알도 따라 흔들린다
침상을 밀어내고 걸어서 혼자
걸어서 나오라고
산뽕나무 뿌리를 삶아 먹이지만
신神은 그를 끌어 당기고 있다
나무젓가락 같은 흰 뼈마디가 비친
유리창 밖 처마 끝
여인이 쏟아 낸 감탄사가 고드름으로 매달리고
나목裸木에 겨울꽃으로 피어 내리던 흰 천사들이
목숨의 끈을 스스로 풀어놓던 시간
서늘한 보자기를 쓴 사내는 병실을 빠져 나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초행길로
12월의 바캉스를 떠난다
사내가 남긴 빈 지갑에 갇혀 살아 오던 아이가
180cm 흰 가운을 입고 내시경 검사실에서
사내가 지나간 그 길로 떠나려는 병동 사람들의
절망을 건져 올리고 있다
출처: 2009,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문학의 전당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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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04년 시 전문지 월간「심상」신인상으로 등단
l `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 詩부문 당선
l `06년 「5.18 기념재단」<문학상 작품 공모> 詩부문 당선 수상
l `06년 제1회 <정심문학상> 수상
l `08년 「시와세계」후반기 겨울호로 <문학평론> 당선
l `09년 제7회 강원문학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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