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시학과 언어

자크라캉 2009. 4. 3. 10:49

                                                           [출처: http://blog.daum.net/chlgmlgh]

 

 

학과 언어

 

 

-시어의 선택과 배열의 원리

 

Ⅰ. 서론

 

  문학은 언어를 통해 사상과 정서를 형상화한 예술형식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기에 한 어휘의 쓰임이 작품의 무게를 좌우하고 감동의 깊이를 가감하기도 한다. 즉 문학은 언어의 쓰임이나 기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의 매체인 언어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우리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폭 넓게 작용하는 요소이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 학문과 지식 등은 이러한 언어를 통해 표현되며 전달된다. 그것은 바로 언어가 가진 지시적 기능이 이들 활동에 있어 중간적 역할, 즉 일종의 매개 고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 특히 시에서는 이런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언어의 기능과 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지시와 전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차원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경지를 언어를 통해서 펼쳐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일상어는 언어 바깥에 있는 사물의 정보를 전달하는데 주력하므로, 그러한 언어는 투명하고 자동화(automatization)되어 있다. 다시 말해 메시지 전달자체가 지배적 기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차 언어 즉, 시적 언어는 전달자체보다는 언어코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보성이 중요하고, 따라서 탈자동화(脫自動化)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조직하고 어떻게 구조화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즉 한 작품은 정서라고도 할 수 있고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가의 생각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와, 소재나 제재를 어떻게 선택하여 배열하느냐에 따라 예술성이 결정된다. 그런 것을 효과적으로 펴 보이기 위해서 형식을 선택하기 때문에 예술에 있어서는 형식이 때로는 내용을 앞지른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런 기본적인 요소를 수용해서 조직해낸 의미 있는 실체가 문학 작품이다. 작품을 유기적 조직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작품 속의 언어는 어떻게 선택하고 배열해야 새로운 미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그간 많은 학자들과 작가들의 견해가 있어왔다. 그러나 유한한 지면에서 그 모두를 살펴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의미 또한 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시자체, 즉 시가 보여주는 특수한 언어구조에 관심을 두고 그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들과 미국의 신비평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주요논의와 그들이 논의한 바 있는 형식의 문제를 관련시켜 시어의 선택과 배열의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서구 시학의 언어관의 변화 양태를 개괄하고, 이러한 변화가 문학이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발전시켜나갔는지, 전통 수사학적 비유를 통해 그 변화와 인식방법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Ⅱ. 본론

 

1. 서구 언어관의 변화 양태

 

  서구의 고전적인 언어관의 시작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별도의 언어관을 논술한 바는 없다. 『시학』과『수사학』 그리고 중요 논제들을 통해 그의 언어관을 유추할 따름이다. 논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의 언어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는 언어를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고유의 특징이자 인간들끼리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사회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고 보았다. 그가 ‘목소리’와 ‘로고스(logos)'로 동물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언어를 구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 언어의 논리적 구조와 실재(자연적 사물) 간에는 서로 대응하는 부합관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대응성은 곧 정확성과 명석성이다. 그에게 있어 언어의 정확성과 명석성은 진리를 보증하는 것이자 실재를 우리 눈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언어는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와 결합을 통해 정확이나 착오가 발생한다고 여기고, 명제(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구문), 개념, 삼단논법 등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그는 플라톤과 달리 실재는 보편자로서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들이란 항상 감각적이다. 당연히 감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에 의해 모방이 가능하다. 이는 다시 말해 단어는 인간들이 사물을 모방하는 도구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모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며, 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사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관은 철학은 물론이고 문학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선 철학적인 면에서 언어는 실재의 명칭이며, 명칭을 안다는 것은 곧 실재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근대 철학은 아시다시피 인식론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식론 연구는 당연히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홉스와 베이컨, 로크 등 근대 경험론자들과 버클리나 라이프니츠 등 관념론자들은 각기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지만 언어의 문제에 있어 사회성, 소통성, 도구성 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칸트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물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으며, 인간은 의식의 선험적인 의식구조를 통해 현상이 지각됨으로써 그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념론적 입장은 니체에게도 이어진다. 니체는 객관적인 사물은 분명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단지 언어를 통한 주관적인 해석을 하고 있을 뿐, 객관적 세계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관점주의라고 불렀다. 이는 언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사물을 혼동하여 개념이 곧 사물이라고 여기는 이른바 물질의 사물화(refication)의 오랜 관습을 타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아성을 구축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고전적 언어관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서구의 언어관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크게 달라진다. 이는 그 전초 작업으로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닌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주장한 K.W. 훔볼트, 기존의 파롤 대신 사회적 관계에 의한 언어인 랑그를 전면에 부상시킨 F. 소쉬르, 19세기 최대의 논리학자이자 근대적 의미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G. 프레게 등의 언어관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미 언어만이 진리를 표현할 수 있으며(가다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심지어 진정한 언어란 없다(데리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과연 그런지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현대 철학은 물론이고 인간학의 저변에 이미 언어에 관한 논의가 밑바탕을 깔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는 바로 20세기에 들어와 기존의 고전적인 언어관과 차별되는 언어관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1961)에서 논의한 논점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쉬르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언어(language)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자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문화의 표지인데, 사회적 측면인 랑그와 개인적 측면인 파롤로 구분할 수 있다. 랑그는 일정한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를 통해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사람의 뇌리에 인식되어진 언어, 즉 구조적 언어로 전체 언어 체계 속에서 추상적인 문법인 언어규칙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공중(公衆)의 허가를 받은 언어로 반복적인 사용을 위해 수동적으로 저장해 놓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파롤은 바로 이러한 코드에 의거하여 실현되는 실제적인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개인이 음성적 수단을 통해 발화하거나 이를 청취하여 해독하는 행위 또는 현상이 모두 파롤이란 뜻이다. 따라서 수동적인 랑그에 비해 개인의 사고나 인식을 전달하는 데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다.

 

  양자는 이렇게 부호와 의사소통(전달과 해독), 사회성과 개인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파롤은 랑그에 의해 규제되지만 때로 랑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가령 시인의 언어는 랑그에 규제를 받는 파롤이지만 때로 랑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는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양자는 상호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기호(記號)란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알리거나 지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 안에는 문자뿐만 아니라 그림, 상징, 지표 등이 모두 포함되는데, 소쉬르는 그러한 기호가 기표와 기의의 양면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언어현상을 기호학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앞서 랑그란 곧 코드라고 하였는데, 기호의 집합이 바로 코드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에게 있어 언어란 곧 기호이며, 문장이란 그러한 기호의 집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말하는 기호가 단지 ‘청각인상’, 즉 단어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기호란 청각적 또는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소리인 기표와 그 안에 내재된 것으로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기의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하는 것처럼 어느 한 쪽이 부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양자는 일정한 언어체계 안에서 관습적인 성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소쉬르는 이를 언어기호의 자의성(恣意性 : arbitraire) 라고 불렀는데, 이는 다시 말해 언어 기호 안에서 기표와 기의가 자연적이거나 논리적 유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표는 다양한 기의를 낳을 수 있고, 따라서 언어는 자체적으로 앰비규어티, 즉 모호성을 지닐뿐더러 속성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과연 은유가 기술이냐 아니면 언어의 속성이냐를 갈라놓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쉬르는 언어는 기호이자 형상으로 실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전달하며, 언어를 통해 청취하고 인식한다. 물론 말은 청각적인 실체이지만 말 자체가 언어의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물리적이거나 생리적, 심리적 여러 요소들의 관계, 즉 추상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체계는 언어기호 상호간의 내적 관계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일 것이다. 소쉬르는 연합관계(rapport associatif), 통합관계(rapport syntagmatique) 등을 통해 언어요소 간의 관계를 설정한 바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소쉬르의 언어관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전대 언어관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언어관이 주로 각기 다른 영역 내에서 유관한 언어문제를 다룬 것에 비해, 언어학이 개별학문으로 분화한 후 언어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이는 이후의 언어철학이나 분석철학의 경우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근대까지의 언어학은 언어를 인간이 대상하는 인식의 도구이자 관념의 표상이라고 여겼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인간이 인식하는 대상이거나 감관을 통해 얻어진 대상에 대한 관념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소쉬르 역시 언어가 도구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도구론이 주로 언어를 파롤의 측면에서만 본 것이라면, 소쉬르는 언어를 파롤과 랑그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별하다.

 

  셋째, 그에게 있어 언어기호는 그 자체로 대상이나 관념을 대체하기 때문에 언어기호 이전에 인식대상이거나 관념은 존재할 수 없다. 이로써 그리스 이후로 서양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로고스 중심주의를 대신하여 문화기호학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넷째, 소쉬르는 언어 자체의 존재를 새롭게 연구함으로써 언어체계 또는 구조의 독립적 자재성과 심미가치를 향유할 수 있었다. 이는 기존의 언어관에서 체계화하지 못한 부분이며, 이후 형식주의자들이나 신비평논자들이 시성 또는 문학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다섯째,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는 자연적이거나 논리적 유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대응성을 강조한 기존의 언어관과 크게 다른 점이다. 물론 이는 통시적 언어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언어는 그 자체로 다의성과 모호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에 이른다.

 

  물론 소쉬르의 언어학 역시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에 의해 논의된 언어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이후 문학이론가들의 논의에 반영됨으로써 특히 시학연구에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시학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떻게 발전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보겠다.

 

2. 시학과 언어

 

  서구 시학의 언어관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언어는 시인이 대상을 모방하고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는 일종의 매개물이라는 견해와 언어 자체의 구조에 의해 시적 진리와 존재가치가 확립된다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원한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모방이라고 했다. 시인은 본성에 해당하는 모방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 따라서 시(서사시)란 인생의 표현을 목적으로 삼는 시인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수단(매개체)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언어, 특히 은유를 비롯한 언어의 변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천재의 표징으로까지 격상시킨 것은 그만큼 은유 등 여러 가지 언어의 변용이 시인과 시에 있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 영미 신비평주의자들의 시학에서 엿볼 수 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물론 후자의 경우이다. 그러나 현대시학의 장강(長江)에서 소쉬르의 영향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는 ‘시어의 선택과 배열의 원리’라는 원래 취지에 따라 그 윤곽을 살피고 모종의 접점을 찾는 데 주력할 것이다. 우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언어관을 보자.

 

2.1.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언어관

 

  러시아 형식주의는 1910년대 말부터 20년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번성했다가 1930년대에 정치적인 이유로 억제를 당하게 된 일련의 문학비평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 이론은 한때 묻혀 있다가 미국에 망명한 야콥슨(Roman Jakobson)이 ‘언어학’과 ‘시학’에 끼친 공로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약 20여 년 동안 비평이론으로서 각광을 받게 된다. 이들의 문학 분석의 타입은 내용분석이나 소개 대신에 문학의 형식적인 측면에 역점을 두며, 나아가서는 문학의 특성을 일반화하여 그 본질을 밝히려는데 관심을 둔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서구의 시학이 언어를 맹신하여, 끊임없이 언어 문제를 언급했지만 끝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결국 시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낳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소쉬르가 사람들이 기표와 기의가 동일한 대응관계에 있다고 보고, 언어 표현을 자연스럽게 실질적인 지시성을 지닌 것으로 여기며, 이러한 습관으로 인해 사람들이 점차 언어가 지시하는 실재를 실재 그자체로 여기며 결국 실재 그 자체를 모르게 만든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시를 말함에 있어서도 시가 시인 까닭은 작가의 심리나 언어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형식에 있으며, 언어가 지닌 여러 가지 측면, 즉 구문, 의미, 음성 등은 모두 그들 상호간의 일정한 형식관계의 창출을 목적으로 동원 된다 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언어의 사용은 문학적인 것과 비문학적인 것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굳게 믿고, 이른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 평범한 언어와 시적 언어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들의 지향은 1914년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쉬클로프스키(Shklovskij)의 “시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의 여러 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의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란 한 대상이 시적임(시성)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예술이 일상적 인식의 습관적 대상이 되어버린 사물에 대한 인식력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적 언어란, 언어는 곧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자 대상에 대한 인간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가 바로 실질적인 존재(그것이 대상이든 아니면 인간의 심성이나 감정이든)와 다를 수 없다는 관점을 파기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자 목적인 셈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시의 본질에 대한 오해’란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소쉬르의 이론을 흡수한 야콥슨의 말은 보다 분명하게 이러한 사실을 일러준다. “시가의 공능(功能)은 부호를 지적하고 지시하는 불일치에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가의 공능은 기표를 기의로 바꾸되 기표가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적 언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롤랑바르트의 제자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논의를 프랑스에 소개한 토도로프 역시 “의사소통에 쓰이는 언어는 애써 명료하고자 하며, 어김없는 전달을 시행하고자 하며, 각종 혼동을 물리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러한 법칙에 역행하여 그러한 규칙들이 어기는 것이 시적언어(랑그)의 기능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모두 일맥상통하는 주장들이다.

 

  이처럼 러시아 형식주의는 서구문학에 있어 하나의 비평적 혁명을 가져왔는데, 그 이유는 종래의 문학이 예술의 모방이라는 시각을 부정하고, ‘형식’이 다른 모든 것을 완전히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문학을 자율적인 실체로 파악한 새로운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인식은 신비평주의자들에게도 공히 적용된다.

 

2.2. 신비평주의의 시적 언어관 : 랜섬(Jone Crowe Ransom)의 경우

 

  신비평주의자들은 시적 언어는 단순한 파롤로서 대상에 대한 인식이거나 객관적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는데, 다만 시란 시인의 경험을 전달할 뿐이라는 주장과 그 자체의 형식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전자는 리차즈에 의해 논의되었고, 후자는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랜섬, 브룩스 등으로 이어져 영미 주지주의 시를 형성하였다. 예컨대 언어는 하나의 사회제도일 뿐 실재 자체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소쉬르의 언어관을 받아들인 리차즈는 “언어는 언어 자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언어를 지시적인 부분(과학적 진술)과 정서적인 부분(정서적 발언)으로 나누어, 시적 언어는 시인이 자신의 경험 자체를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정서적 발화의 일종이며, 그 역할을 진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비해 엘리어트 등은 시를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파악하여 언어에 의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 도피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리차즈의 정서적 발화론과 대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언어의 독립성을(객관적 세계로부터의 독립)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엘리엇의 이론을 바탕으로 신비평 이론을 창시한 랜섬은 스스로 시작을 발표하는 한편 시를 논리적으로 구명하는 일에 상당히 정열을 쏟았다. 그리고 후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시의 특징적인 단면을 밝히기를 기했다. 그는 영시의 과거를 살피면서 거기에 흐르는 두 개의 기본적인 경향을 문제 삼았다. 그 하나는 단순, 추상화의 경향이다. 이것을 그는 관념시(觀念詩, Platonic poetry)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차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한 시다. 이것을 랜섬은 ‘사물시(事物詩, Physical poetry)’라고 했다. 그는 관념시는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쳐 시로서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으며, 사물시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따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형이상(metaphysical)시야말로 경험의 완전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형이상시란 무엇인가? 랜섬에 의하면 형이상시는 관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인간의 몸짓이다. 시적 충동은 관념 때문에 자유롭지는 않으나 관념적 체계, 과학적 논리에 저항하며 이때 시인의 자유가 성취된다. 과학은 실제적인 충동, 실제적인 유용성을 강조하고 극소화하지만, 예술은 인식적 충동을 강조하고 이성을 극소화한다. 따라서 시인에게는 많은 기교의 개발이 필요하다. 랜섬이 강조하는 것은 율격(meter), 허구(fiction), 비유(trope)이다. 율격은 재료를 조직하는 방법이고 시적 상황은 실제적 상황이 아니고 허구의 세계이지만 이 세계는 과학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존재의 실상을 구현한다. 비유는 일상회화에서도 사용되지만 그때는 합리적인 내용을 장식하는 수사학적 개념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형이상시가 노리는 비유는 본질적인 비유, 특히 은유다.

즉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시의 구성양식과 시의 동일성이고 그것은 특수한 양식, 곧 조직(결:texture)과 구조(틀:structure)를 중심으로 해명된다. 조직이 시의 세부들, 곧 시의 구체적이고 국부적인 생명 같은 것으로 세계의 질적인 풍요라면, 구조는 시가 현실과 맺는 논리적 진술을 의미한다. 이는 형식과 내용의 이원론이 다른 말로 변주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러시아 형식주의의 주장과 비교할 때 구조는 곧 논리적 ‘내용’이고, 조직은 표현 ‘형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의 실제에서 조직은 구조를 얽매고 괴롭힌다. 시의 보람은 이런 유의 성가신 모순요소를 지닌 데 있다. 왜냐하면 양자의 역학적인 작용이 있으므로 비로소 시가 인생의 복잡한 진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시는 과학의 빈 터를 훌륭하게 메울 수 있는 인식의 체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초기 신비평 이론을 집약시킨 생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랜섬의 생각에는 큰 덕목과 함께 난점도 개제한다. 그의 출발이 모순․충돌하는 요소들의 포괄, 융합 시도와 함께 이루어진 점은 인정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이원론에 떨어져 버렸다. 

 

  그에 의하면 구조는 논리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요소로 시에서 산문의 형태로 뽑을 수 있는 추론적 언어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해설 가능한 논리적 요소다. 이에 반하여 조직은 시를 산문과 구별시키는 국부적․이질적 세부를 포함하는데, 이 세부는 말할 필요 없이 구체성과 특이성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해설 불가능한 비논리적 요소다. 그래서 랜섬에게 시란 단순한 논리적 틀에 복잡다단한 세부적 결이 얽혀있는 것이 된다.

이런 생각으로는 그 이전까지의 시론을 지배해온 내용, 형식 등 이분법이 시원스럽게 극복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구조의 개념이 제대로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삼스럽게 밝힐 것도 없이 구조란 여러 복합요소를 인정하면서 출발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긍극적으로 시가 여러 요소들의 유기적 통합 형태임을 밝혀가려는 시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랜섬의 생각은 극복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신비평은 물론 러시아 형식주의와 서로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없다. 형식주의 문학운동은 동구, 특히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신비평 문학운동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비평은 텍스트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향을 띤다. 그것은 텍스트의 구조가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중시하지 않는 점으로 요약되는데, 이른바 영향관계라는 것이 흔히 그렇듯이, 직간접의 정도와 계승과 비판이라는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자체의 아름다움이나 미학적 구조를 세밀히 밝히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서정시를 다룸에 있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왔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으나, 소설을 다루는 데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대부분의 논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형식주의가 다루어 온 작가나 작품에 있어서 아주 선별적이었고, 그 결과로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할애할 경우에도 언어, 이미지, 서술방법 같은 특정한 문제만을 강조했을 뿐, 그 밖의 점은 도외시하였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이 잘 완성된 문학이론을 전개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의 가장 필수적인 국면들의 일부를 공들여서 완성하였다는 공적은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수사학적 비유에는 어떻게 나타나며, 또 설명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3. 수사학과 비유

 

  시를 시답게 만드는 전략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역시 은유와 환유로 대변되는 비유법이 가장 전통적인 대답이 될 것 같다. 수사학에 굳건히 뿌리를 두고 있는 비유는 그동안 철학에서 큰 자양분을 얻으며 성장해 왔다. 그리고 이는 현대 언어학에 이르러 좀 더 이론적인 뒷받침을 받는다. 언어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비유의 신비를 벗기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기호학이나 구조주의자들은 언어의 이항대립, 즉 한 현상을 서로 대립되는 두 짝의 변별성을 따져 그 특성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은유와 환유는 바로 그 전통 언어학의 이항 대립을 수사학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은유와 환유가 언어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또 그 두 학문과 문학의 교차점이 된 것은 로만 야콥슨 이후라 할 수 있다. 1896년 모스코바에서 태어난 러시아 출신 미국언어학자 야콥슨은 언어학과 문학이론 방면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고고학, 민속학, 정신분석학, 정보이론 등 여러 학문을 접합시키는 많은 가설과 모델을 제시했다. 특히 그의 「언어의 두 양상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 관한 연구는 정신분석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의 연구의 공동의 장에서 출발하여 거기에 문학적인 수사법의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소쉬르의 언어 구조이론을 수용한 로만 야콥슨은 언어는 모든 기호 체계처럼 선택과 결합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내포한다는 원리를 새로이 규정한다.

 

(1) 결합 : 어떠한 기호이든 또 다른 기호들과 하나의 구성체를 이룬다. 그와 단위의 한 컨텍스트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혹은 보다 복합한 언어단위 속에서 그 스스로의 컨텍스트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언어 단위의 무리지움에서든 그것들은 보다 우월한 단위에 포섭된다. 곧 결합과 컨텍스트화는 동일한 작용의 양면이다.

 

(2) 선택 : 여러 선택 대안들 중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곧 어떤 것을, 어떤 면에서는 동등하면서 다른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른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는 그러므로 선택과 대체는 한 작용의 양면이다.

 

  즉 선택은 여러 다른 가능성들 중에서 한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어떤 유사성에 근거하여 한 용어를 다른 용어로 바꿀 수 있는 대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택과 대치는 같은 작업의 두 면모이며, 유사성을 토대로 낱말을 선택하는 은유의 원리를 따른다. 반면 결합이라는 용어는 끈, 문맥, 연결 상황이라는 생각을 상기시킨다. 모든 언어 단위들은 단순한 차원의 단위들, 또한 그보다 더 복잡한 언어단위 속에서 그 자신의 조직망을 찾는다. 그러므로 결합과 조직은 같은 작업의 두 가지 면모를 가리키며, 인접성을 토대로 낱말을 연결해 가는 환유의 원리를 따른다.

 

  야콥슨은 이러한 언어구조의 두 가지 방법 즉 선택과 결합의 축에 관한 논리를 강조하면서 은유와 환유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두 가지 유형의 실어증을 통해 논거를 제시한다.

 

  실어증 환자 중 한 유형은 유사성의 관계에 혼란이 온 경우인데 이들은 단어들을 찾는 데 힘들어 한다. 즉 선택과 대치 기능에 있어 무능하며 결합과 구조기능에 있어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이 범주의 실어증 환자들은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칼이라는 단어를 절대 말하지 못한다. 단지 그것의 용도나 상황에 따라 칼을 연필깎이라든지 감자껍질 벗기기라고 지칭한다. 또 어떤 환자는 독신자의 아파트에서 독신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대답을 못한다. 단지 “슬픈 아파트”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유사성의 혼란은 명명하는 능력의 상실이며 또한 méyalangue의 기능의 상실이기도 한 것이다. 즉 유사성의 기능에는 장해가 온 반면 결합능력은 보존되어 말의 구조나 결합의 사슬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모든 의미적 결합은 유사성에 의해서보다는 공간적 시간적 인접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령, 고기를 굽는다면, 석쇠라는 물체의 용도, 그것을 만드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서는 석쇠구이를 먹는다는 표현에서 “석쇠” 대신 환유로 “먹는다”라고 말한다. “검다”라는 말을 기억하라 하면 죽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듯이 색깔을 명명하지 않고 그 색깔이 전통적으로 쓰이는 이유를 지칭한다. 한 단어를 반복하라하고 불러주어도 “유리” 하면 “창”하고, “하늘” 하면 “하나님” 하는 이들에게서 한 명사가 그것과 인접한 것으로 미끄러져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인접성의 장해는 “절을 구성하는 능력”, 다시 말해서 단순한 언어 단위들을 더 복잡한 단위들로 결합시키는 능력의 변질이다. 이 유형의 실어증 환자에게 있어 단어들은 그것보다 소차원의 단위로 조직하는 구분적인 규칙들이 상실된다. 이것을 실문법증(失文法症, agrammatism)이라고 하는데, 문장이 단순히 나열이 되어 말하자면 “전보”같은 물체가 된다. 이런 부류의 환자들은 대치할 수 있는 단어들 비슷한 말들을 사용한다. 이렇게 접근한 동의어들은 거의 은유적 성격을 띤다. 즉 “현미경” 대신 “망원경”이라든지 “가스불빛” 대신 “불”이라고 말한다.

 

  야콥슨은 많은 다양한 실어증은 모두 이 두 가지 유형의 실어증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야콥슨은 그것이 선택과 대치의 변질이든가, 아니면 결합과 구조 능력의 상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첫째 유형의 실어증은 ‘선택-대치’능력의 저하를 가져오며, 두 번째 유형의 실어증은 언어단위들 간의 계급을 유지하는 힘을 변질시킨다. 또한 첫 번째의 유형에서는 유사성의 관계가 삭제된 반면, 두 번째 유형에서는 인접성이 제거된다. 유사성 기능의 장해에서는 은유가 불가능하고 인접성 기능의 장해에서는 환유가 불가능하다.

 

  야콥슨은 이 결론의 적용범위를 좀 더 확장시켜 정상적인 사람의 언어활동뿐만 아니라 문학 장르의 학파 등에까지, 또 회화나 영화, 꿈의 분석에까지 끊임없이 이 두 가지 방식의 기능이 발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정상인의 언어활동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문화적 모델이나, 개성이나 문체의 영향에 따라 이들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야콥슨은 시(詩)에서는 유사성의 원칙이 지배적이며 산문은 인접성의 관계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는 기호(Signe)에 중점을 두고, 실용적인 산문은 무엇보다도 지시체(référent)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파에서는 은유적 방식이 우세하고,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중간시기에 속하는 사실주의에서는 환유가 지배적이라고 말한다.

 

  야콥슨이 말하는 선택과 결합이라고 하는 언어 운용의 양극성은 문학의 언어기호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해명하는 데 어떤 방향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선택과 결합이라고 하는 언어의 양극성은 모두 언어생활에서 활용되고 있는 기본 속성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선택과 결합이라는 양극성이 우연적이며 비의도적으로 활용되는 것임에 비해 문학의 언어기호는 비우연적이며, 의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학의 언어기호는 일상어를 그 매체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되 일상의 언어를 무작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면밀한 계획 하에 일상의 언어가 갖고 있는 속성을 확대하거나 변형하여 수용한 언어기호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이 임의적이고 관습적인 언어기호로 짜여져 있으면서 특수한 구성 원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특수한 구성 원칙들은 어떠한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3.1 은유와 환유의 수사학적 특성

 

  문학이 수용하고 있는 문학 특유의 문학법칙은 다양한 층위에서 다각도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수사법상 기본적인 두 종류의 비유법인 은유와 환유는 선택과 결합이라고 하는 언어의 기본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은유와 환유는 비유의 주된 주제를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다른 어떤 등가의 실체로 대체하여 문학적 효과를 높이는 수사학적 장치의 하나이다. 이런 등가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은 동일하되 은유는 언어의 양극성 중 수직적 측면, 즉 선택의 측면을 확대하는 현상이고, 환유는 수평적 측면, 즉 결합의 측면을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택은 문장에 나타나 있는 특정 기표와 대체될 수 있는 기표를 선택하여 기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유사성을 가진 기표가 선택되어 연결된다. 그리고 기표는 다른 기표로 대체가 있은 후 기의를 나타낸다.

결합은 특정 기표가 그것에 선행하거나 후속하는 다른 어휘들과 수평적 혹은 통시적 위치 배정에 따라 그 기의가 달라짐을 말한다. 이때 기표는 인접성을 가진 기표들로 전치되어 결합된다. 그리고 기표는 기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기표들로 계속 치환되는 것이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저항, 거리를 통해서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 공백, 결핍을 메우기 위해 계속해서 기표는 치환된다. 이런 기표의 치환은 기의에 고정되지 못하고 인접성의 관계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결국 선택은 수직적 관계, 언어의 계열체적 관계이며, 유사성에 지배되는 은유적 원리에 연결되고, 결합은 수평적 관계, 즉 언어의 연쇄체적 관계이며 인접성이 지배되는 환유적 원리와 관련된다.

 

3.1.1 은유의 수사학적 특성 - 유사성

 

  은유는 본질적으로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대상이나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비유법이다. 은유를 뜻하는 “메타포(metaphor)”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그 뜻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메타페레인(metaphora)’이라는 그리스어와 만나게 된다. 메타는 ‘너머로(over)’나 ‘위로’라는 뜻이고 페레인(pherein)이란 ‘운반한다(to carry)’는 뜻이다. 그러니까 메타포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을 말한다.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의미의 전이라고 부른다. 은유란 곧 의미의 전이가 일어나는 언어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물론 의미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은 은유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환유나 반어, 역설 또는 상징과 같은 다른 수사법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러나 의미의 전이는 어떤 비유법보다 은유에서 가장 뚜렷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일어난다.

 

환유나 제유에서와는 달리 은유에서 의미의 전이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두 개념영역 또는 의미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은유는 같은 개념이나 의미 층위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오직 서로 다른 층위에서만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은유란 일단 서로 다른 두 대상이나 개념 사이에서 유사성이나 차별성을 찾아내는 비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사성이나 차별성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나 개념이 서로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두 대상이 서로 닮았다거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곧 다른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서로 다르지 않고서는 유사성이나 차별성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은 한 떨기 장미꽃>이라는 은유에서 ‘사랑’과 ‘장미꽃’은 서로 다른 대상이나 개념 영역에 속한다.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인 반면 장미꽃은 넓게는 생물, 좁게는 식물의 차원에 속하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아름답다는 감정의 차원, 즉 유추에 의해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은유는 수직적․계열체적 관계, 유사성, 차이성, 통시성로 이어지는 언어학적인 위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언어를 수직적으로 보는 계열적 관계는 동일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요소와 요소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그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친다.”는 문장에서 “그”에는 “이, 저”를 “선생님”에는 “교수, 강사, 학생” 등을, “영어”에는 “독어, 일본어, 중국어” 등을, “가르친다”에는 “교육한다, 수업한다, 배운다” 등을, 그리고 조사 “은”과 “를”에는 “이/가”나 “는”, “을”을 대체해 넣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동일한 계열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야콥슨은 이러한 계열체적 관계를 유사성에 의해 선택/대치되는 은유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선택은 여러 다른 가능성들 중에서 한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어떤 유사성에 근거하여 한 용어를 다른 용어로 바꾸는 은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선택의 예를 의복이라는 양식에 적용시켜 본다면, “동일한 신체 부위에 동시에 입을 수 없는 옷가지로서 만약 이것을 바꾸게 되면 옷의 의미에 변화가 생기는 요소”를 말한다. 가령 웃옷으로 사람들은 간단한 차림의 티셔츠나 남방셔츠, 블라우스나 스웨터, 캐주얼 차림의 점퍼, 그리고 정장 스타일의 재킷 따위를 입을 수 있다. 아랫도리에 입는 옷으로는 치마를 비롯하여 청바지, 반바지, 치마바지, 정장바지 따위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웃옷이건 아랫도리옷이건 여러 종류의 옷 가운데서 오직 어느 하나만을 골라 입을 뿐 한꺼번에 다 입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선택의 과정은 은유가 발생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은유는 어떤 종류의 유사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