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기(旗) 2 / 김춘수

자크라캉 2008. 9. 4. 20:46

 

 

사진<광주농업고등학교제60회동창회>님의 카페에서

(旗) 2  /  김춘수

   1

  제일 용맹한 전사(戰士)의 손에 잡힌 너는 질타(叱咤)하고 명령(命令)하던 전장(戰場)에서의 너는
  우리들 마지막 성(城)이었다.
  기(旗)여,
  우리들 처음인 출범(出帆)이었다.
  돛대 위에서 항구(港口)의 하늘을 노래처럼 흔들던 기(旗)여,

  펄떡이던 기(旗).
  수지운 시늉으로 나부끼던 기(旗).
  끝없는 하늘가에 저마다 올려 건 기(旗), 기(旗),
  빛나는 천(阡)의 눈동자에 새겨진, 그것이 넘쳐 흐르는 물결이었다.


   2

  기(旗)를 위하여 훈장(勳章)도 없이 용맹하던 사람들도 쓰러져 갔다.
  쓰러진 사람들을 불러 보아라.
  가슴같이 부풀은 하늘의 저기, 그들 무명(無名)의 전사(戰士)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 보아라.

  지금은
  저마다 가슴에 인(印) 찍어야 할 때,
  아! 천구백이십육년(一九二六年),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알프스의 산령(山嶺)에서 외로이 쓰러져 간 릴케의 기(旗)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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