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시

안개/나희덕

자크라캉 2008. 6. 3. 09:40

사진<마음 속의 비밀>님의 블로그에서

개 / 나희덕

 

 

나는 바늘이다
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
마악 몸을 밀어넣기 시작한다
나는 종이다
눅눅해지도록 누워 있다
더 이상 젖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갈매기다
너무 멀리 날아와버렸나보다
갯내가 나지 않는다
나는 박쥐다
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쥐가 되지 못했다
나는 맨드라미다
닭벼슬 같은 내 입술을 그가 삼켜버렸다
금잔화가 따라 울었다
나는
느티나무다
가지 끝으로 누군가의 살 속을 찌르고 있음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는 가로등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
그는 내 배경이 되어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좌석버스다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는데
좌석은 이미 만원이다
나는 자전거다
나를 타고 간 사람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서 쳇바퀴 돌리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

나는 이미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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