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사

제15회 전태일 문학상 심사평 / 맹문재

자크라캉 2008. 3. 13. 11:43

 

화기 속의 여자 / 이명윤


  어디서 잘라야 할 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 면 좋을 텐데요.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
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 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 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
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중입니다. 뚜뚜뚜뚜.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 

자본주의 시대에 필요한 전태일 정신 / 맹문재

                                 
전태일의 정신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를 심사기준으로 삼고 예심을 거쳐 올라온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해마다 응모하는 작품 수가 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가지고 무엇을 썼는가는 물론이고 어떻게 썼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어떤 권력에 의해 억압되거나 유린당할 수 없다고 결연히 대항했던 전태일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자 계급으로 대변되는 약자들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지나치게 지배받거나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 결과 이명윤의 「수화기 속의 여자」외 6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명윤의 작품들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감각적이고 날렵해 자칫 가벼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삶의 아픔들이 녹아 있음이 발견된다. 체험의 내용들을 작품의 품격을 유지하는 요소로 만드는 성실성이 돋보였다. 앞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사회적인 의미로 담아내는 시선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송태영의 「트랙터 순례자들의 노래」외 2편은 상당히 긴 호흡을 가지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형상화가 잘 되어 있고 호흡 또한 유장하여 무리 없이 읽힌다. 성급한 세계화의 추구에 따라 점점 위축되어 가는 농민들의 현실을 대변하면서 극복하려고 하는 정신은 그지없이 소중한 것이다.
김양진의 「뒷간 천정에 목을 맨 그는」외 3편은 투박한 면이 있지만 자신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담아내어 작품의 힘이 있다. 가난과 멍에와 구조조정과 관계된 체험들을 인간의 가치문제로 담아내려고 한 성실성이 돋보였다.
유현아의 「어머니의 청계천2」외 3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려고 하는 시선이어서 좋았다. 구체적인 아픔들이어서 시인 정신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밖에 김서하, 박정민, 김건, 심은섭, 최규하 등의 작품도 손을 떼기가 아까웠다. 자본주의의 위력이 점점 거세지는 이 세계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계속 지키려고 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