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태평양을 건넌 식물도감 / 추종욱

자크라캉 2007. 11. 4. 20:57
 

 

                        

                                사진<♡은혜의동산♡>님의 플래닛에서

 

 

 [2007년『서시』 하반기 신인당선작 ]

 

 

평양을 건넌 식물도감 / 추종욱

 

 

태평양을 건너 LA에서 이주해 온 식물도감 12페이지에서 에레지를 본다

<자주색으로 6개의 꽃잎과 산지의 비옥한 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초다>

를 읽고 나도 모르게 누나하고 불렀다

나는 식물도감에서 패랭이꽃, 달맞이꽃, 엘레지라는 이름을

숙자, 영숙, 명자 누나라

개명한다

 

태평양 건너 어딘가에 피어있을 수많은 그녀들이 나는 그립다

해질 무렵 집집의 담장이 지친 해바라기들을 동생처럼 업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온 것 같아 창 밖 내다본다

이제 갓 입학하는 어린아이들이 꽃잎을 가슴에 달고 꽃밭으로 등교 중이다

 

그녀들은 나를 찾지 못하는 술래들이다

나는 날마다 꽃잎 글썽이며 식물도감을 펼쳐들고 그녀들을 찾는다

조금 더디게 피어도 한 계절 화사한 꽃들의 일기를

지나가는 소슬바람이 내 창에 매일 찾아와 옮겨 적는다

 

쪽진 반닫이 창문을 펼치면 ,

이 세상의 페이지마다 꽃잎들의 사연이 적혀있다

꽃잎 뚝뚝 떨어뜨리는 꽃들을 바라보면, 이제 곧 헤어져야 하는 꽃들처럼 슬프다

서울시 식물도감구 엘레지 동 12페이지에서 나는 그녀들과 상봉한다

 

봄 한철 지나가는 아픔들이 그녀들을

활짝 꽃 피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