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나루토공식>님의 카페에서
수(首) / 청마 유치환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恩惠(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 유치환의 '首'
■ 경주에 가면 마음이 비교적 고요해진다. 혼자 책장 앞을 서성거리며 책을 뒤적이는 시간도 주어진다. 그 책장에는 서울의 짐을 줄이면서 옮겨놓은 나의 옛 책들이 꽂혀있다. 그 중에 한권을 뽑아 들었다. '낙화'의 시인 이형기가 쓴 '시 창작법 강의'다. 그 책을 넘기다가 재미있는 짧은 산문 하나를 만난다. 우리나라의 시들 중에서 고전이라 일컬을 만한 시를 꼽으라면 뭘 꼽을까. 글은 그런 질문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초보 시인들을 겨냥해 시 창작에 대해 강의한 뒤 진정으로 전범(典範)을 삼을 만한 작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세 작품을 꼽았다. 첫째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었고, 두번째는 이상의 '오감도', 그리고 마지막 한 작품이 바로 유치환의 '수(首)'였다. 김소월이나 서정주가 빠지고, 이들 세 사람이 오른 것도 특별하게 느껴졌고, 작품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만해의 작품의 경우는 언뜻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이상의 오감도와 청마의 수를 우리 시의 고전으로 꼽는다? 뜻밖이었다. 그런 선정의 변(辯)은 이유를 '새로움'에 두고 있었다. 시정신에 충격을 주고 그 새로움이 하나의 기원(紀元)이 된 작품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오감도의 새로움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청마의 수는? 그것은 효수되어 걸린 비적의 머리를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파격을 높이 산 것이었다.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점을 청마가 보여주었다는 평이다.
그런데, 청마는 저 시, '수(首)'때문에 최근 친일 시비에 휘말렸다. 경남 지역 시민단체는 이 시가 친일 혐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통영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통영우체국은 청마가 정운 이영도(시조시인)와 연서를 주고받던 창구였던 바로 그 장소다. 청마의 시 '행복'의 무대가 된 우체국이다. 시민단체는 친일 혐의가 있는 시인의 이름을 공공건물에 붙이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실록 친일파'를 쓴 임종국은 유치환의 작품 '首'가 친일시라고 단언하며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작은 가성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 세력의 총칭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근거로, 시가 씌어진 1942년 당시 북만주의 그 지역에는 마적같은 깡패 집단이 아니라 항일세력이 존재했으며 그들이 주로 비적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청마의 기념사업을 주도해온 통영문협은 이같은 주장에 대해 울분을 토한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기미 독립선언에도 참여한 대시인은 이렇게 모욕할 수가 있느냐는 얘기다. 청마는 국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친일인사 명단에도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비적은 청마 본인이 밝힌 대로 '떼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던 도적의 무리'라고 반박한다. 사회적 공인에 대해 확증적인 근거도 없이 대충 시기를 추정해 허울을 덮어 씌우는 것은 문화적 '살인'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저 시에서 '비적의 머리 두개'가 누구 것이냐에 있다. 항일 독립군의 머리를 바라보면서 청마가 저 시를 읊었다면 그것은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라는 삼엄한 인식이 결국 일제의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발언으로 둔갑한다. 청마가 본 것이 보통의 만주 도적들이라면, 청마는 죽음에 대해 치열한 사색을 펼친 원래의 평가를 돌려받는다. 나는 청마를 믿는다. 그가 일제를 두둔하기 위해 그런 시를 썼다면 비적의 신원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비적을 독립군으로 일단 해석해놓고 청마를 문제삼는 태도는 개연성만 가지고 한 삶을 뒤늦게 때려잡으려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유죄를 완전히 입증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법정신을 고려해도 그렇다. 저 시는, 이형기의 관점 대로 힘있고 빼어난 우리 시의 고전이요 문화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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