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활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감상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새롭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꽃'에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한 존재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과정이며 존재 사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소망한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단추를 눌러 주는 것'으로 대체하였고, '꽃'을 '전파'로 바꾸었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라는 대목에서 화자는 사랑하고 헤어짐을 라디오를 켜고 끄는 손쉬운 행위에 빗대어 현대인들의 가벼운 만남, 쉬운 이별 이라는 소비적인 사랑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꽃'에서의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만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활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라는 대목은 무의미한 존재로 방치되고 소외되어 있는 고독한 현대인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출처 : ppeppe42
글쓴이 : 지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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