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

사실과 虛構사이 / 金 素 雲

자크라캉 2007. 7. 2. 17:40

23. 실과 虛構사이 / 金 素 雲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란 뜻이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을 통해서 하나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 -외국문학애서 그런 예를 든다면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그 전자요, 오스카와일드의 작품 같은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이것은 일본의 작가 다자이오사무는 두고 나 자신이 쓴 해설의 첫 대문이다. (동아출판사간 <세계의 문학 대 전집> 제8권 p540)

다자이란 작가의 <허구의 美> 내지는 <허구의 진실>을 설명하기위한 전치사이지만, 요컨대 문학이나 문장에 있어서의 허구는 결코 경시할 것 도 부인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서두를 앞장 새워두고 나 자신의 글이란 것을 돌이켜보면 실로 <허구> 그것과는 나무나 거리가 먼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란 반드시 사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소위 내가 쓴다는 글은 언제나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목적이었고, 익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쓰는 글 -그것이 과연 옳을 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윗물을 흘러 버리고 뒤에 남은 진국-침전된 알맹이 -그것이 진정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목적의식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내 글 따위는 부질없이 흘러 버리고만 있는 한갓 윗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글이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는, 체질적으로 공상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인생의 생활 그것을 문학이나 예술성보다는 한걸음 앞서서 언제나 직시하고 분석하려드는 성급한 내 기질에 연유하는 지도 모른다. 할말이 너무 많고 보면 결론에 도달할 최단거리에 마음이 쏠려 <허구의 진실> 같은 복잡한 수속을 밟을 겨를이 없다고 그렇게 보아주는 이는 무척 고마운, 너그러운 지기라고 할 것이다.

춘천에서 있었던 일을 쓰면서 원주나 천안으로 지명을 바꿔 넣지 못하는 그런 변통성 없는 내 글 (물 한 그릇에 행복>을 p.17)에도 허구 아닌 허구가 얼굴을 내밀 때가 있다. 그런 예의 하나가 <밥이나 먹어줄까‥‥‥>란 짧은 글이다.

40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 그리고 그 애기의 무대가 서울이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주인공인 H는 실상은 일본청년이오, 하숙 살이 하는 그의 친구도 역시 안도오(安오000)라는 일본인이다. 안도오는 꽤나 ㅇ예쁘게 생긴 누이동생과 한 하숙방에서 장기체재를 하면서 渡彿할 노자를 벌고 있었다. 양화가인 연도오가 부유층 일본부인들의 「오비」기모노의 띠)에 장미를 그려서 돈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을 그의 친구들이 비꼬아, 이름자인 시게루(滋)에「오비」를 붙여서「안도오 오비시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숙집 아가씨>가 기실을 안도오의 누이요, 그 누이를 만나러 매일같이 일참 하던 H는 사사끼 히때미치 H란 이니시얼은 <히데미쯔>의 <히>에서 딴 것이요, 그가 남긴 시집이란 무샤노 고오지 사네아쯔(武者小路責篤)가 서문을 붙여 신죠오샤(新潮社)에 서 낸 서정시집 한 권을 두고 한 말이다.

<주먹으로 한 대 후려 갈기고 싶도록 H가, 미워졌다> 이 대문에도 픽션(虛構)이 있다. 『싶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그와 같이 나오는 길에 나는 지금 을지로3가 근처 큰길에서 주먹으로 한 대 후려 갈겼다. H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길바닥에 뒹굴어 넘어졌다. 그만한 우정 같은 것을 그에게 느끼고 있었기로서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어지간이 지나친 감정 폭발을 했던 것 같다.

어느 여성지가 <증오를 느낀 순간>을 쓰라고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이지만 H를 '일본인이라고 밝히면 사연은 복잡해지고 글의 초점은 흐려져 버린다. 무위도식의 식객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식사 때를 알려주는 그런 가정은 아마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꿰나 설림에 넉넉하다는 친척 댁」이면 혹시 그런 친절도 있고 전화도 있으리라> 해서 이런 蛇足이 붙은 것이요, H가 식객노릇으로 붙어사는 그 일본인 집은 사실은 친척도 아인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허구는 <유리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을 통해서 진실을 발굴하려는 그린 예술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다만, <증오의 순간>이란 주어진 과제에다 글의 초점을 두었기에 불필요할 가지들을 추려 버렸다는 하나의 예를 들어 보았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