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

수필작법4. 生活속의 文學 / 金 宇 鍾

자크라캉 2007. 7. 2. 16:55
필작법4. 生活속의 文學 / 金 宇 鍾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들 한다. 수필의 형식을 단적으로 지적한 말이겠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잘못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잘못 쓰면서도 누구나 쉽게 쓰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보충적 설면 없이 받아 들인다면 대게 그런 결과를 나타낸다. 붓 가는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렇게 쓴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교를 부렸으되 기교의 티를 보이지 않고 形式을 따졌으되 형식의 구속감을 보이지 않고 그저 저절로 그렇게 된 양 자연스러운 느낌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돌을 다듬어서 만든 다보탑이나 석가탑에서 당대(匠人)능숙한 기교와 탐의 엄격한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저절로 바람에 닦이고 땅바닥에 굴러 다니던 돌에서도 조형미의 극치를 발견할 때가 있다. 거기엔 애써 연마한 기교의 손길도 보이지 않고 어떤流派나 사조의 영향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연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조각이다.

수필의 형식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요건은 반드시 수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시나 소설도 기교한 눈에 띄면 이미 감동이 반감된다. 형식에 있어서도 형식자체가 문학의 形態美로 발전한 대표적인 것이 시조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가장 훌륭한 시조는 그 형식에 구속함을 벗어나고 있을 때 나타난다. 黃眞伊는 그런 구속감을 벗어나서 마치 붓 가는대로 수필을 쓰듯 시조를 읊은 대표적인 시인이다.

수필의 이 같은 형식과 그 작법을 흐르는 물에 비교해 본다면 더욱 설명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유롭게 제멋대로 구불구불 흐른다. 막히면 돌아가고 벼랑이면 굴러 떨어지고 솟구쳤다가 부서 졌다가 다시 흐른다. 그러면서도 여기엔 일정한 룰이 있고 기교가 있다. 내려가던 물이 다시 기어 올라갈 리가 없고 이유 없이 흩어지고 뭉칠 까닭이 없다. 그러고도 조금도 그 기교와 법칙을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아름다운 곡선미와 율동미를 마음껏 발휘하는 자연의 예술이 된다.

이러한 수필은 한국의 전통적인 수필로 말하자면 그 소재를 대개 <나>의 생활주변에서 얻고 있다. 서구적인 수필<에세이>이 대개<나>의 생활보다는 <우리>의 생활에서 소재를 얻고, 주관보다는 객관적인 사고의 경향이 짙은 것과 달리 우리의 수필은 대개 그와 반대의 뉘앙스를 갖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쓰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경향이 다를 수 있고 또 자기 개성에 맞는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경향의 수필이든 그것은 지적 감각과 정서적인 감각을 다같이 지녀야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매우 친밀하게 사리를 따지고 사물을 관찰해 나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학작품으로서는 거부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정서적인 감각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나가는 따뜻한 분위기를 안 주어 독자를 피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자도 알만한 사리를 따져 나간다는 것은 깔보는 결과가 되므로 작품으로서는 실패다. 그런 대표적인 수필이 산수를 찬미하고 꽃과 달과 가로수와 하늘의 흰 구름 등을 찬미하는 수필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미끈한 문장력으로 다시 한번 찬미해봤자 그것은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이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치밀한 논리가 따를 때 비로소 그 논리는 설득력을 지닌다.

한편 이렇게 지적이면서도 그것을 정신적인 감각으로 부드럽게 감싸야만 좋은 수필이 된다고 하는 것은 수필이 곧 문학이요 예술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물을 지적인 감각으로 관찰하고 논리를 다져 나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철학이나 과학적 관찰기록이나 산문 기사는 될 수 있어도 문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항상 어떤 옷을 입고 있는 무엇이다. 알맹이만으로 전부가 아니고 또 겉에 입는 옷만으로도 전부가 아니고 어떤 알맹이(內容)에다 옷(形式)을 입힌 것이다. 정서적인 분위기는 그 같은 옷의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애수와 환희와 찬탄과 시원함과 새콤함 등 여러 가지의 文樣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옷이 날개라고 하듯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도 수필은 이 같은 옷을 입었을 때 비로소 문학적 감동을 지니게 된다. 이러“정신이 은화처럼 맑다” (李箱의 날개에서 )할 때 “맑다”는 내용은 은화의 이미지를 옷으로 걸치고 훨씬 :맑다“라는 내용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필은 이러한 紋樣의 옷을 입어야 되면서도 좀더 멋진 옷의 수필이 되려면 紋樣自體에도 더러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시종일관 “...이다”나“...ㄴ다”같은 종결어미로만 끝난 수필을 읽으면 쉽게 짜증이 날것이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강요가 아니라 여유를 보이는 문학이다. 비록 자기 소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혹시 이런 것은 어떨지?” 하는 의문형도 있고 솔직한 詠暵形도 있는 것이 수필의 세계이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이런 것이다”로만 일관해서야 수필의 품위가 살겠는가? 그러니까 수필은 표현기법에도 앞뒤로 조금씩은 변화를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 오만엔 여러 가지가 있다. 너무 단정적인 것도 오만이다. 너무 박식한 것도 오만이다. 너무 난해하고 관념적인 것도 오만이다. 지적인 경향을 강조할 때는 오히려 오만이 매력일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특히 전통적인 우리의 수필에선 이 같은 오만은 배재되어야 한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나”의 취미, 나의 인생관의 세계라고 한다면 단정이란 금물일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동서고금에 달통한 박식을 늘어 놓을 수필도 있지만 지식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요, 지혜를 전하는 자리이며, 단상에서의 강론이 아니요 단하에서의 동료끼리의 대화가 수필인 이상 그런 것은 거부 되여야 수필의 품위가 산다. 또 그와 비슷하게 너무 관념적인 난해한 용어를 골라 쓰는 사람도 있다. 수필이 생활의 문학이라면 그 언어도 생활적인 것에서 골라 써야 하며 또 대개의 경우는 그 같은 쉬운 말 만이라도 모든 표현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