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시

아마추어 레슬링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자크라캉 2007. 2. 2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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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03년 11월 13일(목요일) 13: 37 연합뉴스에서

 

마추어 레슬링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 살 하나 박이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청춘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를 끌어안듯 그는
온몸을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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