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 / 최동호

자크라캉 2006. 3. 25. 14:43
특집3/디지털 시대와 詩의 독자들-최동호 | 詩란
2006.02.19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


최동호


1.

현실에서 가상으로 리얼리즘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머지않아 다가올 사이버 현실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가 실재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실재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전시대의 향수를 고백하는 최고조가 되기 쉽다. 혹자의 눈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와 소설이 잡지에 발표될 뿐 아니라 수많은 단행본들이 출판된다고 비판당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문학 종사자들이 느끼는 것은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당혹감을 느낄 만큼 독자 또는 수요자의 부재이다.

오늘의 현실을 20■30년 전이나 10년 전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인터넷에 의해 확산된 디지털 세상은 이제 어느 누구나 일부 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라 만인의 공유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혁명은 산업혁명이나 그 이전 어떤 문화적 혁명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인 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혁명이 활자문화시대의 지식보급을 확대시켰다면 인터넷혁명은 전파문화시대의 기술정보의 가속화를 무한대로 혁신시켰다고 할 것이다. 전파문화가 활자문화 위에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전파문화의 급속한 성장과 보급은 활자문화시대의 지식과 교양을 타파하는 새로운 신세대 즉 2030세대 문화를 범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애국계몽운동의 시대를 21세기 기술정보의 혁신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새 세상을 맞이한 것이다. 시나 소설을 읽을 시간도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킬 시간의 여유도 없을 만큼 급박하게 달라지는 세상에서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이라고 한들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가볍고 얇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소설은 물론 시도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많던 독자는 정말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일까. 그들은 모두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일 것이다.


2.

디지털 시대와 시의 존재 방식 최근 학교의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필자는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활자문화 세대들의 종이책 독자들이(다른 의미에서 구매자들이) 모두 전파문화의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버린 것이라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적 코드가 컴퓨터화면이나 영상적 자막에서 구현하고 있는 세계는 활자문화가 요구하는 읽고 사색하는 노력을 강탈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력적이고 화려한 것인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독자들에게 책읽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날 2030세대를 길들이고 있는 것은 기술정보이며 컴퓨터 자판이지 백지의 여백에서 살아 움직이는 활자문화의 인문적 교양의 코드가 아니다. 디지털적 상황에서 시의 존재방식을 필자는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문학동네, 2000. 9.)에서 다음 세 가지로 전망한 바 있다.


첫째, 거대패러다임으로 대중들의 의식을 통합하고 지배하는 시적 사고는 분화되고 모든 시적 운동들은 소집단화할 것이다. 잘게 분화되어 때로는 작은 취미그룹으로 세분될 것이다. 유사한 기질과 취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자기의 삶을 시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자기존재를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둘째, 출판매체가 활자문화에서 전파문화로 뒤바뀔 것이며, 새로운 기술개발에 의한 매체들을 적절히 사용할 때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의 호응도 커질 것이다. 시를 주도하는 집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분화되겠지만, 시라는 예술양식은 시와 노래, 춤은 물론 다양한 매체를 종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셋째, 레고 게임과 같은 조립과 해체의 놀이 문화가 일부에서 퍼져나가 있지만 시의 경향은 명상과 관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예술적으로 드높이려는 쪽으로 전개될 것이며, 이러한 방향이 적절치 않을 때 많은 시들은 왜곡되고 불구화될 것이다. 특히 명상과 사색의 시편들을 음악에 실어 노래로 유행시킬 수 있는 음유시인들이 등장할 것이며, 그들은 아탈리(J. Atali)의 표현대로 유목 문화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디지털적 상황에서 이러한 시의 세 가지 존재방식들은 아직도 거대담론이 완강하게 지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윤곽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화가 지닌 첨단성과 보수성으로 인해 아직도 상당 부분 20세기적 요소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시와 소설은 물론 모든 예술의 존재방식은 필연적으로 격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이 낡은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려고 할수록 그 기반이 되는 독자들은 모래사장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급격히 사라져 갈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문화적 첨단성은 우리로 하여금 2002년 6월의 월드컵 신화를 경험하게 했고, 2002년 12월의 대선에서도 인터넷 세대의 열망이 선거의 판세를 좌우했음을 우리 스스로 목격한 바 있다. 이후 20, 30세대와 50, 60세대의 깊은 단절감은 기성세대들에게 정서적 공황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세계사적 전쟁의 징후가 엄습하는 국제적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암중모색의 혼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식민지 해방이나 마르크시즘적 사회혁명이 20세기에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인류의 공동체적 환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가 가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가상과 현실은 뒤바뀌고 현실보다는 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의 독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가상의 현실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블랙홀 속에 나날의 기쁨에 탐닉하는 것이 오늘의 문학 수요자들인지도 모른다. 활자문화가 열어준 상상의 공간을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을 매개로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는 문학의 생산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출판업자들이 명분 삼아 내세우는 구투의 상술을 코웃음칠 것이다.


3.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최근 거의 모든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전공은 소설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9 : 1이나 8 : 2 정도로 소설 전공자들이 대학원을 메우고 있다. 시에 비해 소설 전공자들의 진로가 그렇게 밝기 때문은 아니다. 시 전공자가 많았던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놀라운 역전이다.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의 흥미가 이렇게 소설에 기울은 것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요구되는 서사적 구성이 그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하소설이나 SF소설을 제외하면 창작소설이 잘 팔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대학에서도 유능한 소설 이론의 전공자를 구하기보다는 지명도 높은 작가를 찾는 상황에서 그들의 진로가 결코 밝은 것도 아니다. 학부에서 ■시 창작■ 수업시간에도 수강생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지녔던 약간의 호기심 때문에 청강을 시작한 학생들도 한 달 이상을 버텨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문예창작과의 창설이 한 때 유행이었지만 상당한 문학수업을 거쳐 문예창작과를 졸업해도 유명 시인이나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많은 학생들이 자주 전공을 바꾸기도 한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동시에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생들에게 왜 시를 쓰기가 어려운가라고 질문하면 그들은 시를 쓸 것이 없다고 한다.


시를 쓸 수 있는 체험이 결여된 탓이다. 체험 없는 소설은 SF적 상상력 주변을 배회하게 되겠지만, 체험 없는 시는 증류수와 같은 언어를 조작하거나 할 것이다. 괴테는 어디선가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울면서 밤을 새워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아파트에서 지하철과 컴퓨터로 이어지는 생활에서 무슨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시가 나올 수 없는 생활이 젊은 세대의 대다수에게 통용된다면 그들은 시를 읽을 마음도 가지기 힘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혁신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자기 복제를 뒤쫓기에도 바쁠 것이다.

모두가 숨돌릴 사이 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왜 그러한가 생각해 보면, 자기라는 존재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상 공간을 부유하듯 떠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만화경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과연 시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필자 나름으로 판단해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시의 연구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시와 음악 즉 시와 노래의 결합은 우선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시와 노래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시가(詩歌)’에서 시(詩)와 가(歌)가 분리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중심이 없고 높낮이가 없는 동시다발적인 것이 특징이다. 앞에서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을 대변하는 음유시인의 도래를 논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활자문화시대의 엘리트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발상일 뿐이다.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시인으로 불리우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신경림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된 것(■동아일보■, 2003. 2. 2)은 그의 민요 찾기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정지용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노래로 불리워지는 ■향수■와 ■고향■과 같은 시편들 때문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다. 저항운동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가 서서히 독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다. 김소월에서 신경림으로 이어지는 노래시의 전통이 우리 시의 중요한 흐름을 되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는 김우창의 지적(■시의 리듬에 대하여■, ■세계의문학■, 1999, 봄호)은 좀더 깊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적 공동체의 열망을 되살리고 이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길이다. 이는 20세기의 리얼리즘적 가치지향을 일부 이어받기도 하지만 또한 이를 부정하고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야 할 사항이다.


오늘날 시의 부재는 예민한 감각은 살아 있지만, 시적 방향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정립된 것이 없다. 독재권력의 타도라는 눈에 보이는 적이 제거된 다음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때 뼈아픈 자기부정을 치루어내야 한다. 세계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태평양에서 동아시아로 거대한 변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시아에 중심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때 우리는 또 다시 20세기적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힘 겨루기는 이라크에서 북한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민국가에서 민족 국가로의 전환은 세계화 대 지역주의의 대결처럼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쟁점들을 스포츠로 분출시켜 준 것이 월드컵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세계 각 곳에서 한민족은 20세기에 누적된 민족적 열등감의 찌꺼기를 떨쳐버리는 공동체적 환희를 체험한 바 있다. 단군이 개국하여 신시를 연 이후 한민족이 체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그 체험은 시적인 엑스타시였다. 시가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시가 도달해야 되는 극치의 한 순간을 우리는 경험했던 것이다.

밀폐된 시 의식에 갇혀 정신분열증적 시가 거듭 복제되고 있다면, 시는 몇몇 정신불안 징후의 사람들의 자기 위안 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시가 민족 공동체적 열망을 분출하는 첨단에서 설 때 민중시대와는 전혀 다른 디지털 시대의 선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30세대를 체험이 결여된 세대라고 단언할 수 없다.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아젠다를 내걸고 이를 성취시킨 것은 그들이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민족의 꿈을 성취시킬 수 있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깃발의 환호성에서 5060세대는 가슴이 철렁하는 아니면 모종의 불안감에 바둥거려야 하는 레드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모하다고 할 만큼 그런 감정의 찌꺼기가 없다. 그런 까닭에 진취적이지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은 5060세대의 참담한 자기 희생으로부터 솟아나온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5060세대의 체험으로 헤쳐나가기에는 전혀 이질적인 세계이다.


한국적 사고의 중심축에는 5060세대의 체험이 깊게 자리잡고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첨단적인 도전은 2030세대의 무모한(?) 자신감이 필수적 추동력이다. 그들이 앞선 세대의 체험을 추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활자문화와 전파문화 사이의 커다란 단절이 어쩌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더 큰 도약대가 될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아직도 후진적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이 기술정보산업의 세계 최첨단에 서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서구의 근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근대의 초극을 보여 주는 한국만의 독특한 사례일 것이다.


1930년대 이상(李箱)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인 유리거울 앞에서 분열된 자아를 발견했다. 21세기초 한국의 젊은 세대는 한국에서 생산된 세계 최첨단 LCD판 앞에서 사이버세계의 화려한 불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슨 구리거울 속에서 참회록을 써야 했던 것이 식민지 시대의 윤동주(尹東柱)였다면, 초대형 LCD판 앞에서 현실보다 더 가혹한 현실의 섬광을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오늘의 2030세대인 것이다.


4.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디지털 기술은 모든 예술로부터 예술적인 것의 아우라를 빼앗아 갔다. 원본보다 더 생생한 원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서 논한 복제품과 원본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2002년 말 한 종교집단은 인간 복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아직 그 과학적 검증이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인간 복제의 시대가 현실로 눈앞에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해 온 것은 인간 존재의 유일 절대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종교와 예술과 문화의 역사가 이를 전제로 성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가 부정되거나 새롭게 씌어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인간의 삶이 역사에 기록되고 종이책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 저장되고 가상의 공간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시대에 종이책에 기록된 시와 소설을 읽는 고루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머지않아 사이보그 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기술정보를 장악한 몇몇의 인간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나 예술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원할 때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와의 한 대담에서 황동규는 “시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자기 갱신의 시인■, ■서정시학■, 2002년 여름)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인간이란 긍정적인 면도 포함되지만 부정적인 온갖 요소도 포함된 존재이다. 예술은 부정적 탐욕적 인간에게 욕망의 긍정적 자기갱신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인간이란 지고지선의 존재가 아니다. 지고지선을 동경하고 지향하지만 추악한 충동에 더 휩쓸리기 쉬운 존재가 인간이다. 시나 예술이 탐욕적 충동에서 인간을 구원할 때 인류사의 미래도 존재할 것이다. 한민족이 지닌 열정의 폭발이 예술적으로 승화될 때 거칠고 조야한 삶은 순치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성적 추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확인과 자기 갱신이 없는 일방적 전진은 그 속도감만큼 위험성을 내포한다.

단거리 질주자처럼 질주해 온 한국 경제가 성수대교와 같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험이 있거나 기술정보산업의 강국이라 자부하던 한국이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이러한 속도전의 취약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가 될 것이다. 독서 행위는 이러한 속도감으로부터 일탈적 행동이거나 침잠의 여유를 가져다 준다.


1980년대의 시는 사회적 추동의 최첨단에 서 있었다. 지금 기술정보사회에서 사회적 첨단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있고, 그것을 작동하는 프로그래머의 머리 속의 연상 작용에 있다. 그러나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속도전은 기계적 인간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시를 읽는 시간은 인간의 정서적 결핍을 충족시켜 주고, 자신의 삶에 풍요로움을 되살려 줄 것이다. 테크노피아의 사막에서 과연 인간적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사이버 세계로 사라진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디지털 시대를 뒤쫓는 말단의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출의 소프트웨어의 운용자는 풍요로운 인간성에서 비롯되는 자기 성찰의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디지털적인 속도전에 대다수가 몰려가고 있을 때 필자가 떠올려 보는 것은 “아마 朝鮮文壇 전체로도 이대로 3年이면 3年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年 동안 推敲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年보다 훨씬 水準 높은 文壇이 될 것이다”라는 1930년대 이태준(李泰俊)이 그의 ■무서록(無序錄)■(1940)에서 한 발언이다.


‘날림’공사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을 것 같고, 오늘의 처지는 더욱 날림을 성행하게 하는 것 같다. 밀려드는 청탁서 때문에 쉴새없이 써내는 유망한 젊은 시인들에게 그리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마비된 손을 기지고 스크린만 쳐다보는 매니아들에게 이태준의 이 발언을 되새겨 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버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사이버 중독자들은 더할 나위가 없다. 끝내 발딛을 현실을 갖지 못하게 되는 컴퓨터 중독이 때로는 마약중독보다 더 심각하다고 경고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닐 것이다. 모두가 자기들의 주장만 떠들어대는 세상이란 필경 들뜨고 중독된 얼치기 세상임에 분명하다.


시나 소설이 그리고 다른 여타의 예술들이 이러한 중독의 치료제나 완충제가 되지 못한다면, 디지털 유토피아는 그 끔찍한 얼굴로 인해 대면하는 순간 그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20세기나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가혹한 신세계가 될 것이다. 물질의 풍요를 향해 치달리는 디지털적 속도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글은 시사랑문예대학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에서 발표된 원고 내용을 사진과 함께 수록한 것입니다





1. 강의 목표와 방향 <현대시론>은 국어국문학과의 전공과목이다.

학부생들은 이 강의를 통해 현대시에 대한 개론적 이해를 심화하는 한편 다양한 작품을 스스로 분석 평가할 수 있는 기초적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이번 강의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구체화하였다. ① 현대시의 장르적 특성 이해 ② 시적 언어의 특징에 대한 기본적 이해 ③ 현대시의 요소에 대한 이해 ④ 현대시 분석 방법론의 이해와 실제 이와 같은 학습목표를 대단위 강의에서 달성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지루한 이론중심의 강의로 흐르기 쉽다. 토론수업을 병행한다 하더라도 90여명이나 되는 수강생수를 고려하면 역시 형식적으로 진행될 것이 염려스러웠다. 특히 발표나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다수의 학생들이 '방청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조건들을 검토한 결과, 작품의 분석과 토론은 모든 수강생이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2. 강의 진행 방법 주당 3시간 15주의 강의를 이론 강의와 토론수업으로 나누었다. 강의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제 1주차와 7주차,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제외한 나머지 주의 경우 온라인 토론학습을 병행하였다. 강의 교재는, 유종호 최동호 편저,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현대문학, 1995) 와 최동호, ■시 읽기의 즐거움■, (고려대출판부, 2001)을 사용하였다.



강의 진도표

 


수업 중에 활용된 온라인 세미나는 세 가지 유형인데 이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의 방식은, 2주차에는 자유토론 형식으로, 3주차에서 6주차까지는 강사가 제시한 작품과 작품해석을 중심으로 토론하는 제시문 토론형식으로, 7주차 이후의 14주차까지는 2인 이상의 학생들이 발표하고 수강생 전체가 토론에 참여하는 유형이었다.


강사는 자유토론과 제시문 토론시에 발표문을 제시하는 역할을, 7주차 이후에는 온라인 세미나의 토론 내용을 출석 수업 시 평가했다.


○ 자유발표토론 - 주 제: ‘내가 생각하는 시와 나의 애송시 해설‘ - 발표자: 전원 - 토론방식: 모든 수강생은 발표문 중 하나 이상을 골라 자신의 의견을 답글로 제시하고 발표자는 답글 중 하나를 골라 다시 답변하는 형식.


○ 제시문 토론 - 발 표 자: 강 사 - 토론방식: 강사의 작품해설 및 분석에 대해 모든 수강생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오프라인 수업시 종합적으로 답변하고 필요시 토론함.


○ 온라인 세미나 - 발표자: 제시된 작품에 대한 발표희망자 2-4인 - 토론방식: 모든 수강생은 모든 발표문에 대해 질의, 토론을 답글 형식으로 제출하 고 발표자는 토론문 중 3이상을 골라 재답변하는 형식, 강사는 토론 결 과를 차기 강의시간에 개괄적으로 평가함.


3. 강의의 실제 새로운 강의 방식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가 높은 가운데 강의가 진행되었다. 온라인 세미나는 홈페이지를 별도로 개설하지 못하고 <블로그>사이트의 ‘내 페이지’를 활용하였다. <블로그>의 게시판은 발표와 토론문의 길이 제한이 없고, 토론문 전체를 게시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게시판이었다.

수업진행 도중에 ‘내 페이지’의 게시판만으로 집중적인 토론에 어려움이 있어 별도의 게시판을 개설하여, 발표와 토론은 에서, 공지사항이나 수업진행에 관한 학생들과의 질의 응답은 ‘내 페이지’의 게시판에서 이루어졌다.

 


수강생들의 첫 반응

⑴ 자유토론의 진행 온라인 세미나의 첫 주제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수강생들의 현대시 장르에 대한 지식과 작품에 대한 취향, 감상하는 관점이나 방법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출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직접 확인하고 토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주제의 취지 설명과 함께 온라인세미나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주의사항도 함께 제시했다. 대화명은 실명제로 할 것, 글쓰기와 대화는 페이퍼나 강의실에서 사용하는 형식을 유지해 줄 것, 은어나 채팅 용어는 가급적 자제할 것을 요청했는데 수강생들은 이러한 주의사항을 학기 내내 잘 지켰다. 첫 주제의 토론은 예상대로 시에 대한 생각들이 다양하게 제출되었으며, 자신과 시관이 다르거나 같은 학생의 견해에 대한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다음 예와 같이 토론과 답변, 재 토론이 두 차례이상 거듭되기도 했다.


첫 주제 토론 진행 사례

① 김훈태의 글에 대한 토론 28 기형도의 <대학시절> 9613070김훈태 2003/03/15 88 105 국어국문학과 99130024 박동식입니다. 박동식 2003/03/23 34 108 2002130053 국문학과 서현아입니다. 조금 다른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서현아 2003/03/23 33 162 쓸모없음과 쓸모있음의 기준은.. 9613070김훈태 2003/03/23 25 178 2002130053 서현아 -넵!!! +_+ 서현아 2003/03/24 11 110 국어국문학과 2001130086 신상철입니다. 신상철 2003/03/23 33 130 9713063입니다. 이재균 2003/03/23 15

② 방유진의 글에 대한 토론

34 국어국문학과 2000130084 방유진 입니다. 78 136 방유진님의 시관에 대한 비판입니다. 9813036 권대용 2003/03/23 18 174 답변입니다. 방유진 2003/03/24 13 177 답변 권대용 2003/03/24 9 ⑵ 강사 발표에 대한 학생토론 이 토론 형식은 강사가 고전적인 작품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제시하고 학생들과 토론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본격적인 발표수업에 들어가는 과정으로 설정되었다. 수강생들에게는 발표의 형식을 제시하고, 또 발표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에 사용된 작품은 김소월의 ■나의 집■,■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 박용철의 ■고향■,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등이었다. 김수영의 ■가옥찬가■는 분석과 토론문을 제시하지 않고 모든 수강생들이 자유로이 감상하고 분석하도록 하였다.


토론 참여 사례

1 김소월의 '살음'은 곧 삶에 대한 '적의'와 '희망'을 아슬히 걸친 허무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허무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개아미(개미의 집짓는 행위는 가히 지속성과 반복성을 띤다)는 집짓기를 즐기면서 집짓기를 위해서 살아간다. 사람도, 개미들처럼, 삶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행복이라는 이상을 넘어 삶 자체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의미있는 일임을 화자는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노라면 죽게 되고 죽으면 어떤 무엇도 무의미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있는 것은 오직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최은영)


토론 참여 사례

2 가장 멀고 긴 여행은 귀향하는 것이다. - 老子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 이성복은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말한다. 그는 반복해서 '여기는 아님/ 아님/ 아님' 이라고 쓰고 있다. 나는 그것을 몸은 여기 있으면서 정신은(혹은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는 혹은 가고자 하는 상태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거기'로 지칭되는 다른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원하는 욕망의 의지로 생각한다. 또한 이성복의 목소리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목소리로 확장되어 읽히곤 하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잃어버렸을 '무엇'과 '거기'가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거기'가 좀더 추상화된 공간이라면 박용철의 '고향'은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메타포일 것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하고, 가서 머무르고 싶어하는 회귀의 욕망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잠정적인 상실감에서 비롯된다. 박용철의 시에서 그 상실감은 자신에게 마치 이 세상의 맨 처음과도 같이 마음 속에 남아있을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나타난다.


시 속에 나타나는 것들은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 지금의 모습과 '마을 앞 시내도 옛자리 바뀌었'을 거라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내비치는 손상된 이미지이지만, 박용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고향은 찾어 무엇하리'로 시작되는 극단적 상실감은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둔 '어린 때 꿈'과 닿아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형상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박용철이 고향의 모습을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탈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슬픔을 초월하려 한다거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모습들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한용운의 '男兒到處是故鄕'(오도송)을 보며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면, 박용철의 시를 보면서는 잠시나마 삶을 위로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향의 나날들 속에서 나지막히 울먹이던 마음이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로 시를 통해 하나가 될 때 함께 흔들리게 되는 것. 그것이 노자의 말처럼 가장 멀고 긴 여행길에 올라있을 인간을 다시금 걷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방유진)


⑶ 온라인 세미나 발표수업의 마지막 단계로 설정되었다. 이 토론에서 발표자들은 출석수업 과정에서 논의한 시의 요소와 방법론을 작품해석으로 연결시키는 데 특히 유념해 줄 것과, 기존의 해석이나 평가를 참고로 하되, 가급적 자신의 눈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작품의 선정은 고전적인 작품 뿐 아니라 당대시인들의 작품도 함께 제시했다. 토론과 답변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토론 과정의 개요

1204 최영미 - personal computer 발표문 입니다. 이은혜 2003/05/31 155 1213 2002130364 김영리 김영리 2003/05/31 21 1598 '배설'에 관해 질문하신 분들 보세요. 이은혜 2003/06/02 9 1223 비유의 적절성.. 김훈태9613070 2003/05/31 23 1594 계집의 이미지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들 보세요. 이은혜 2003/06/02 9 1226 2002130591 조범상 조범상 2003/05/31 21 1595 '공리적' '자본주의적'이라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들 보세요. 이은혜 2003/06/02 6 1244 9114004 이우진 이우진 2003/06/01 16 1246 2002130053 서현아 서현아 2003/06/01 14 1267 99360143 사회학과 한수현입니다. 한수현 2003/06/01 16 1600 역사의식의 상실"이라는 부분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은혜 2003/06/02 6 1293 2002130703 김지영 김지영 2003/06/01 10 1310 2002130574 이상글 이상글 2003/06/01 12 1312 2002130549 국어국문학과 이다희 이다희 2003/06/01 12 1319 2002130686 이선영 이선영 2003/06/01 10 1330 2002103831 김윤경 김윤경 2003/06/01 11 1335 9813073 김영우입니다. 김영우 2003/06/01 9 ■■(이하 답글 생략) 질문 사례 조범상: "<필요할 때 늘 곁에서><알아서 챙겨>주는 존재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렇다면 컴퓨터와도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철저히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라고 하셨는데, 컴퓨터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자본주의적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이 함유하는 뜻이 너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요? (다른 이야기이지만 과도한 문단 나누기로 발표문을 읽기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문단마다 한 줄씩 띄우는 것이 시각적으로 편하긴 하지만 글의 단락이 어디에서 나누어지는지 알기 힘들어 주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답변 사례 이은혜: 이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들이 많은 걸로 봐서 제가 과도하게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시적 화자가 컴퓨터와 관계를 가지겠다는 발상을 '공리-어떤 행위에 의해 얻어지는 공명과 이익-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한 이유를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화자는 자신이 필요할 때 항상 옆에서 있어주는 컴퓨터에게 인간미를 느끼고 친구보다, 애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챙겨주는 컴퓨터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 싶고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컴퓨터에게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모든 것을 나의 필요와 욕구에 맞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보면, 화자가 필요할 때 '그'가 내 곁에 없다면, 그가 화자를 챙겨주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녀의 사랑은 오간데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러한 측면에서 저는 시에 나타난 사랑, 관계를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속성은 절대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철저한 교환관계이고요. 컴퓨터는 화자에게 '늘 곁에 있어주고' '말없이도 알아서 챙겨주는' 행위를 통해 인간적임을 느끼게 했고, 화자는 이에 대해 '그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픈'감정을 느끼고 그에게 사랑을 주게 됩니다.


제가 자본주의적이라고 했던 부분은 화자가 컴퓨터에게서 사랑을 느낀 이유를 생각해보면 쉽게 연관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영우 학우님의 경우에는 저의 이러한 해석이 시인의 반어적 의미를 간과한 즉각적 해석이 아닌가? 시인은 오히려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발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지 않느냐 하셨습니다. 이 시를 반어적으로 읽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반어'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시를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김영우 학우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반어적으로 읽으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 시가 컴퓨터와 그러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단절을, 그렇게 퇴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처를 나타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시인이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발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과 시에서 나타난 '사랑', '관계'의 발단이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으로 읽힌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님께서 이 시의 어느 부분에서 '시인이 공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발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온라인 세미나에 발표자들은 대부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참고 도서를 통해 작품의 개요를 파악하고 자기 나름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80여명의 수강생들이 제기한 질문과 토론 가운데 대표적인 토론문 셋을 골라 답변을 했으며, 재반론이 있을 경우에도 충실하게 답변했다.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도 매주 2-6편 가량의 발표문을 모두 읽고 질의와 토론을 했다. 간혹 형식적인 토론이나 지엽적인 사항에 매달린 경우가 발견되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발표자는 매주 2-3인을 넘지 말아야 했다. 5-6인의 발표문에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토론하도록 한 것은 무리였다. 4. 평가와 결론 온라인 세미나의 수업의 장점은 가장 경제적이면서, 다방향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온라인 세미나에서 학생들이 제출한 발표문과 토론문은 A4 용지로 2,000 페이지가 넘는다.


이 정보들은 80여명의 학생들이 한번 이상 공유한 것이므로 실제로 소통된 정보량은 최소한 160,000 페이지로 추산된다. 물론 이 세미나의 진행에는 단 한 장의 종이도 사용되지 않았다. 발표자의 경우 발표문을 복사하여 배부하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으며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은 발표된 글을 숙독하고 질문이나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발표자 역시 토론자들의 모든 의견을 충분히 검토한 다음 답변을 할 수 있다. 이는 온라인 토론에서만 가능한 의사소통 방식이다. 때로 형식적인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서 다수가 침묵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 토론학습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수강생수가 40인 이상인 경우 온라인 수업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온라인 발표와 토론을 병행한 현대시론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특히 수업방식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제시된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접하면서 학생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토론 교재로 다양한 경향의 시를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학기말에 실시한 <개방형 설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의 강의 평가 요약


개방 설문 결과에 나타난 부정적인 반응 가운데, 커리큘럼과 강의 스타일, 교수방법. 수강생 수와 같이 강사의 개인적 자질이나 일반적인 내용을 제외한다면, 온라인 세미나를 진행한 사이트 구조와 운영방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온라인 세미나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습정보를 제공하면서 소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게시판 형식의 개발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제목형 게시판>들은 답글의 첫행이나 제목만을 게시하기 때문에 일일이 클릭하지 않으면 토론 참여자들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 이번에 실험한 ‘블로그’의 게시판은 답글의 전문을 읽으면서 스크롤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운 결함이 있다. 특히 길이가 긴 답글이 이어질 때 이러한 결함은 두드러진다. 이러한 문제는 토론의 성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사이트에 최소한 두 종류의 특성이 다른 게시판을 준비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 강사는 주제와 토론용 참고 글을 제시하고 학생들은 온라인 세미나를 진행한 다음 오프라인 강의에서 이를 개괄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사 역시 온라인 세미나가 진행되는 적절한 시점에 개입해야 하고 토론이 마무리되면 종합 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학강의에 온라인 소통구조는 사이버대학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조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증가하는 수강생수와 오프라인 강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온라인 강의를 한층 높은 수준까지 결합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학습의 도입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① 토론학습 효과의 극대화 ② 수강생들의 학습참여도 향상 ③ 수강생 평가의 객관화와 다면화 ④ 강의 방식과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와 반응의 동시화 이외에 발표문을 준비하고 복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효과도 있으며 디지털화된 강의 내용과 토론문들은 생생한 강의자료로 활용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온라인 강의가 만능은 아니다.


효과적인 진행을 위해서 강의담당자는 출석수업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하며 무엇보다 학생들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한다. 또 강의의 성격에 맞는 사이트나 홈페이지를 미리 디자인하고 준비해 두어야 한다. 쌍방향 매체인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세미나에서 다수의 학생들과 교수가 소통하는 방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면 강의는 기대 이상으로 알차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