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스크랩] 고화질 화면으로 방영되는 디지털/송시월의 시 세계

자크라캉 2006. 3. 22. 23:23

 

 

 

고화질 화면으로 방영되는 디지털

― 송시월의 「12시간의 성장」을 중심으로



오 남 구

 (시인, 시향주간)



들어가는 말― 아방가르드


송시월의 시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이다. 한편, 동양적 시각으로 보면 나를 혁신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깨다’에서부터 비롯된 ‘본디의 의식을 찾게 되다’ ‘열리다’ 등 일련의 뜻을 갖는데, 특히 선각자들의 수행에 의한 큰 ‘깨뜨림’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식(앎)을 열고 기성의 관념을 깬다.

‘아방가르드’는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기성의 관념이나 유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던 입체파를 비롯해서 다다이즘 초현실파 등의 혁신적인 예술운동을 총칭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본질을 보면, 서양의 2분법적 구조의 이원론을 깨뜨리고 동양의 합일(合一)된 일원론으로 이행하는 예술운동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공연에서 백미는 역시 아방가르드이다.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연출을 하는 그의 공연에는 해프닝이 있어 ‘연기자’와 ‘관객’이라는 종래의 2분법적 구조를 깨뜨리고 관객이 함께 공연한다.

한 관객이 무대로 뛰어 올라와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를 도끼로 부숴버리거나 백남준의 근엄하게 맨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린다. 특히 그의 고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하면서 보여준 연출은 감동적이었다.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피아노 건반에 갑자기 물감을 칠하고 관객이 나와 꽝하고 피아노를 넘어뜨린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그에게, 기자가 “왜 피아노를 넘어뜨립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말한다.

“심심해서…, 할 것이 없어서”

백남준의 이 아방가르드는 현대예술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심심해서, 할 것이 없어서”라는 이 한마디는 그가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버리는 단말마인지도 모른다. 예술을 ‘심심해서’ 하는 원초적 유희본능의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기존 관념으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 ‘깨뜨린다’는 해프닝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자부하고 있으면서, ‘한국을 내세우면 죽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것을 굳이 세계적이라고 촌스럽게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된 반어적 어법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판소리 한마당이 ‘광대’와 ‘청중’이 창(唱)을 하고 추임을 하면서 한자리에 어울려 공연이 완성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해프닝’에는 거침없이 관객이 튀어나와 그의 공연에 동참한다. 이것이 ‘관객과 연기자’라는 종래 2분법을 깨뜨린다는 그의 아방가르드인데, 그 원형으로 판소리 한마당이 자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 아방가르디스트 예수와 시인


송시월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시를 쓰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깨달음’을 아방가르드로써 이해해 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 집행관이 최후의 회유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하라, 살려주겠다” 한다. 그러자 예수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이것을 시인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의 큰 ‘깨달음’이 더욱 아방가르디스트답게 보인다. 그래서 모든 구약의 관념들인 율법이 깨지게 되고 그의 ‘깨달음’의 길(道)로 인도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묘하게도 ‘창조론’이 근간에서부터 흔들린다. 즉 사람의 몸이 신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성립됨으로써 종래의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2분법적 관념이 깨뜨려진다. 그러나 신화적 스토리로 정립되면서 다시 이원론으로 정체(正體)하게 된다. 

송시월의 「남산의 동쪽」이란 시를 보면, 이러한 서구 이원론(二元論)의 신화적 스토리 속에서 어떤 의문을 갖는 것 같다. 짐짓 시인은 수녀에게 말을 거는데, 아마 자신에게도 수없이 반문한 말일 것이며 의문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의문을 갖다가 어느 날, “풀에는 죄가 없다”고 느낀 듯, ‘선·악’을 구분짓는 2분법적 구조의 관념(원죄론)을 깨뜨린 것처럼 보인다.


“수녀님 지금 뭐 하세요?”

"잡풀을 뽑지요."

"잡풀이란 뭐지요? 죄 없는 풀인데,

사람의 말 아닌가요?"

내 투명한 언어에 찔려

산책로 계단을 총총히 내려서는

그녀, 바람에 날리는 풀머리 어수선하게 엉킨다.

남산의 동쪽

고만고만하게 누워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초록

뿌리 잘린 명아주 토끼풀 뱀딸기 까시랑풀

몇 밤 자고나니 거뜬히 기재개 뜬다.

이슬눈 투명하게 굴리며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고화질 화면으로

푸르게 어우러진 내 아이들

풀 풀 풀

            ― 「남산의 동쪽」 전문


텍스트를 살펴보면, “수녀님 지금 뭐 하세요?” 하고 묻자, “잡풀을 뽑지요”한다. “잡풀이란 뭐지요? 죄 없는 풀인데, 사람의 말 아닌가요” 반문하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수녀와 시인의 갈등이 노출된다. 시인은 수녀가 ‘잡풀’이라고 한 것을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사람의 말’은 진실과는 관계없다.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악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이 시를 쓸 무렵에 송시월은 사람의 말인 언어에 대한 회의가 깊고 언어의 탈관념이 화두(話頭)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남산의 동쪽’을 산책하다가 영감을 얻고 사진을 찍듯 관념을 제거하여 묘사해 낸다.

그런데, 독자에게 「남산의 동쪽」은 ‘에덴의 동쪽’을 연상시키게 하고 ‘잡풀’이란 ‘언어의 감옥’을 깨뜨리고 또 동물과 식물이란 종의 경계도 무너뜨리고 풀이 곧 내 아들이 됨으로써 ‘신의 아들 = 나’, ‘나의 아들 = 풀’의 등식을 이룬다. 그래서 「남산의 동쪽」은 아방가르디스트 송시월이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고화질 화면으로 지상에 방영하는 디지털 세계 같다.

특히, 「애기 풀새」란 시에 이르러 직관으로 고화질의 물상을 포착하게 되는데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그는 풀의 싹을 ‘애기 풀새’로 인식하고 풀과 한층 더 친밀해져 금세 말이라도 나눌 듯 입술이 간지럽다. 그리고 또 「엘빈의 커피잔」이란 시에서 물 먹은 상현달을 건져 올리기도 하는데 입술을 딸싹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옥상 구석 빈 분에 돋는 풀을 뽑다가 멈칫, 손끝에 찌르르 전해오는 떨림, 어! 이건 초록새다. 새 잎의 날개 활짝 펴 종 종 종 발레를 하는 풀, 내 손등을 간지럼 태우는 풀, 흙에서 막 깨어 난 풀에게 ‘애기 풀새야’ 하고 부르면 이슬 눈으로 나와 눈맞춤을 한다. 어느새 내 눈이 투명해져 보이는 것마다  참 맑다. 이때, 포르르 날아 내리는 한 무리 참새 떼, 무어라 무어라 재재거림에 내 입술이 간지럽다.

                                                                        ―「애기 풀새」 전문



■ 디지털의‘고화질 화면’으로의 이행


이후, 동인지 시류(詩流)에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디지털리즘을 선언한다.(선언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고화질 화면으로 방영되는 디지털 세계」의 실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 시를 표현과 내용으로 나누어서 보게 될 때 ‘고화질 화면으로 방영’은 곧 표현이고 ‘디지털 세계’는 그 내용이다. 이 슬로건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제시해 놓고 있다.

송시월은 이런 새로운 내용과 표현의, 「고화질 화면으로의 이행」이라는 ‘시쓰기’의 과제를 안게 된다. 그래서 선언한 ‘접사와 염사’* 등을 실험한다.

앞에서 살핀 「남산의 동쪽」과 「애기 풀새」 등의 시편들과, 연작으로 쓴 「언어의 감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실험하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언어의 감옥」은 깨뜨려야 할 ‘관념의 감옥’이다. 언어, 즉 관념의 감옥에 갇히면 본질이 가리어 진실한 사물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방가르디스트 그들이 가진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그는 늘 관념에 빠지곤 한다. 「언어의 감옥.1」에서 ‘관념의 예수’를 보면,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살이 물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햇살 올챙이들 쏟아져 나와 바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다. 바위가 갸웃 몸을 튼다. 개버들 가지의 그물망 빠져나온 빛살무늬의 버들치들, 여인의 얼굴에 뜬 하얗게 굽은 낮달을 살랑살랑 지나간다.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다시 붙는다. 찌르르 얼굴이 아프다. 이때, 누군가 첨벙 손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 관념의 예수.

― 「계곡 물 속의 풍경」 전문


물 속의 풍경을 대물렌즈에 밀착시켜 사진을 찍어(접사) 내듯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거울같이 맑은 물 속에 어리는 것들! 일렁일렁 바람이 가고 햇살이 물 속에 꽂히고 올챙이 줄줄이 기어오르고…, 여인의 얼굴에 버들치들이 살랑살랑 지나간다. 그는 이런 물 속을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세련된 고화질 화면으로, 어른어른 디지털 세계의 어떤 본질(염사)을 보여준다. 이때 첨벙! ‘관념의 예수’가 손을 담근다. 그는 거울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物)과 아(我)가 하나 되어 물 속에 비친다. 어른 어른거리며 ‘선·악’의 어떤 구분이 없이 2분법의 관념이 깨뜨려지고, 자연한 풍경의 순수한 ‘나’, 그 본질을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원죄가 있는 신화적 스토리의 주인공인 ‘관념의 예수’ 안에서 갈등하고 있다. 오히려 첨벙! 절망하는 그의 인간미가 뭉클하다.



■ 구토(嘔吐) 이후의 자아의 성찰


이내 그는 관념의 「구토(嘔吐)」를 시작한다. 「구토」는 한때 실존주의 작가들에 의해 하나의 테마가 되었던 것인데, ‘존재의 우연성’을 주장하여,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의 성찰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신의 관념’을 토해낸다. 즉 송시월처럼, 임하고 주재하는 신의 권능으로부터 벗어나 앞에 놓인 사물들을 새롭게 탄생시키며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은혜니 축복이니 하는 등의 ‘신의 관념’을 토해내고 있다. 그래서 사물의 본질 그 순수성을 되찾으려 한다.


2004년 3월 전화기가 구토를 한다


따르릉 폭설을 토한다

따르릉 실크바람을 토하고 오후 3시의 햇살을 토한다

따르릉 진달래를 토하고 하얀 목련을 토한다


엇물린 신호음, 뚜탄 뚜핵 뚜탄 뚜핵……


청계천이 30년 묵은 검은 가래 토하는 소리

― 「구토」 전문


「구토」는 짧은 시이지만 탈관념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전화기를 통해 구토를 형상시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물성의 본질 그 순수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관념의 영점(zero point)이라 할까 그런 노력으로써 탈관념한다.

폭설, 실크바람, 햇살, 진달래 등 일상적인 사물을 볼 때 신의 관념으로써 보아왔다. 전쟁을 일으키는 시오니즘과 웰빙의 이슈(issue)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런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관념의 ‘나’를 혁신하려 한다.

물론 이것은 서구에서 시작한 초기 아방가르드 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송시월에 이르러 그가 ‘디지털 시’를 실험하면서 그 바탕에 ‘나’ 또는 ‘자아(自我)’를 놓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내세운 슬로건처럼, 새로운 방법과 내용인 「고화질 화면으로 방영되는 디지털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직관의 ‘디지털적’ 또는 ‘물리적 인식’으로서 합리적 관념적 인식에 반동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선언의 서(序)*, 「유리판 위에 놓인 생명의 절편」에 주목하여, 물리적 인식의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특히 그의 「자화상」이란 작품을 보면 사물을 ‘보는법(관법)’이 예사롭지 않다.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짝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가 휙 일렁이며 간다.

― 「물웅덩이」 전문


발밑에 거울 조각을 놓고 보듯 물웅덩이에 조각난 사물의 절편을 본다. 이런 사물의 인식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데, 소위 ‘물리적 인식’이라는 것이며 직관으로 명징(明徵)한 상(像)을 포착하려 한다. 그래서 탈관념하여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하며, 『시는 찍는 것(인식)이며 방영(표현)한다』는 나름의 새로운 주장을 한다.

그는 명징한 영상을 포착하는데, 길을 가다가 문득 물웅덩이에 비친 조각들 사이, 그 틈새에 납짝 끼인 ‘나’를 본다. 그때 생명의 어떤 본질인 동(動)·정(靜)의 리듬처럼 휙 멧새가 일렁이며 날아간다.



■ 푸른 진통 그리고 의문의 물음표


이렇듯 그는 관념의 보편적 추상적인 본질을 부정하고 개별적 구체적 실존의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작품 「월식」은 의미심장하다. 『자유, 평화, 사랑, 꿈 이런 말들이 머루빛으로 익은 지상의 밤. “엄마”하고 부르는 딸아이의 목소리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잘 익은 머루알이었다. 나는 머루빛 밥을 짓고 친구를 만나 머루빛 눈이 내리는 길에서 머루빛 시를 얘기했다』라고 회상하며, 『지금은 시큼하게 어둠이 발효된, 부엉이 날개가 꺾인 새벽 2시 좀생이를 보는 순간, 어둠이 초생달 하나를 반쯤 토해내고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살펴보자. 흔히 관념을 말할 때에 『붉은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인다.』고 비유한다. 이처럼 그의 시오니즘 등의 관념이 달콤한 머루빛(어둠)으로 물들어서 심지어 흰 눈도 머루빛으로 되어 버린다. 그런데 지금은 어둠이 시큼하게 발효된 새벽 2시이다. 불안스러이 좀생이(별점)를 보는 순간, 새 생명의 어떤 싹처럼 어둠이 초생달 하나를 반쯤 토해내고 있다. 아마 그가 ‘관념의 구토’ 이후에 다중 의미(달거리 등)의 「월식」을 리얼하게 표현한 것 같다.

이제 그에게는, 구체적인 실존의 사물을 보게 되면서 갈등의 터널이 앞에 놓인다. 소위 그가 직면한 ‘불안’, ‘초조’,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인데, 「푸른 진통」 그리고 의문의 물음표로 압축되고 있다.


물음표에서 싹이 튼다.

모니터에 뜬

비안개 자욱한 쌍 우물의 언저리

어느 밤 유성이 떨구어 논 살 비듬 ?

혹은 월식의 발자국 ?

초음파로도 판독이 유보된 꺼뭇꺼뭇한 ?들

?가 낳은 ?의 새끼들 ???

오늘 봄비에 젖은 애무덤 같은 저것들

푸른 진통

싹 !!

쑥 잎과 냉이 순이 싹트고 있다.


내 유방을 만지면 아직은 얼얼한 강물소리 바람소리

손바닥에 쑥내음 냉이 향이 불그스레 묻어난다.

( 유방암 조직검사∼ 요 ? )

― 「푸른 진통」 전문


갈등은 바로 그의 정신적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장미꽃 해부도」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 칸나꽃」 「12월 그리고 통증」이란 시는, 특히 그가 병원에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갈등상태에서 쓰고 있다. 물론 문명의 이기인 초음파, CT 등의 체험을 통해서 디지털적 인식의 동영상 이미지로, 생명의 어떤 비밀스런 의문 부호의 암호를 풀 듯, 떨리는 눈으로 슬픈 생명의 본질(중심)을 들여다본다. 그는 「12시간의 성장」이란 시에 이르게 되고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초침과 추(알)로써 성장해가는 생명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세상이 또록또록 반짝인다.

중천을 한참 비켜서서

초록 눈금을 먹는 시계 알

초록 ∼ 초록 ∼

가려움을 쪼다가

미운털이 박히다가

골골골 알을 짓다가

꼬끼오 운다.

낮 10시에 흔들리며 운다.

― 「12시간의 성장」 일부


■ 존재 x, y 좌표 디지트(digit)의 세계


「눈부시게 깨어나는 수면 공간」은 실제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바라 본 공간일 테지만, 죽음과 같은 ‘어둠‘으로 암유된 관념에서 깨어난 것이다.

디짓(digit)은 손가락이란 뜻인데 손가락으로 수를 센 것에서 유래하여 ‘숫자’를 의미한다. ‘디지털’은 ‘숫자를 사용하는’이란 형용사의 뜻처럼, 소리나 화상 등을 2진법의 숫자로 데이터화 하여 사용함으로써 정확하고 빠른 송·수신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시대의 ‘푸른 진통과 의문’으로 불안하던 시인의 갈등 상황이 일단 정리되면서, 퇴원하는 날일지 모르나, 새벽녘의 눈 뜨는 공간에 빛나는 별자리를 바라보게 된다. 하늘神의 한 귀퉁이가 선명한 선율로 눈부시게 부서져 내린다. ‘선명한 선율’은 아마 그가 C.T.며 초음파며 영상으로 만난 생명의 비밀한 소리들을 체험한 직후에, 별자리를 보자 바로 직감한 선율인 듯싶다.


부슬 부슬 어둠이 떨어져 모르스 부호로 찍히고

새벽녘의 눈 뜨는 공간

반짝이는 상형의 악기들,


야금자리 갈루버자리 탄부르자리 거문고자리

구슬리자리 클라이버자리 심벌즈자리 수르나이자리

라이베스자리 단소자리 가물란자리 마우피스자리

색소폰자리 파이프오르간자리 클라리넷자리 키타자리


굴러가는 숱한 겨울의 바퀴들, 장엄한 오케스트라

아다지오 알레그로로 안단테로 때로는 프레스토로

그믐밤 하늘을 구르는 선명한 선율,

공간 한 귀퉁이가 부서진다.

― 「눈부시게 깨어나는 수면공간」 일부


별자리는 점이다. 모니터에서 위며 간이며 신체의 각 부위를 보았듯이 그 존재하는 위치가 있다. 그는 지금 하나하나 별자리 악기를 세며 지루하도록 확인하고 있다. 「빈 자리에 서면」 등 작품에서도 화분들을 세는데, 이 수를 세는 알고리즘(algorithm)은 그간 언어의 관념적 추상적 본질을 부정하고 사물을 확인한다.

그의 시 「사각」은 점이다. 모니터에서 실선을 확대해 가게 되면 금시 이해가 된다. 실선이 점선으로 보이고, 다시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사각형의 점이 보인다. 이 점은 임의의 프로그램(약속)된 수(數, 2진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위치가 있다.

이 점의 인식은 컴퓨터와 광학기기를 동원함으로써 눈으로 보는 현실보다 더 명징한 영상을 보여주게 되고 일상적 관념을 깨뜨려 버린다. 그래서 시인의 새로운 인식과 문학은 디짓(digit)의 ‘숫자의 세계’인 디지털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글을 쓰며, ‘눈물이 주룩 쏟아진’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갑자기 사물들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그는 지금 ‘사각 방’ 속의 ‘나’를 발견하고 ‘보이는 것’ 모두 사각이다. 흔들리는 글자도 ‘사각사각’ 사각으로 숨 쉬고 말을 한다.

 

사각 방 속의 나, 보이는 것 모두

사각이다. 사각 벽, 벽면의  거울

액자, 그 밑의 책상, 책상위의 모

니터, 모니터 옆 책장, 책장에 꽂

인 책, 그 옆으로 창문 문밖의 하

늘, 하늘을 이고 선 빌딩, 빌딩에

매달린 간판, 간판 속의 흔들리는

글자들, 사각사각 사각으로  숨쉬

고 사각의 나 모서리가 말을 한다

 

모리와 모서리가 부딪는 공간,

유리알 하늘을 쳐다본다.

청옥빛 쨍그랑 깨지며 콕 찌르는 햇살

투명한 초록 눈물 주룩 흐른다.

― 「사각」전문

 

그때, 유리알 하늘을 쳐다본다. 모서리와 모서리가 부딪는 공간, 청옥빛이 쨍그랑 깨지며 콕 햇살이 찌른다. 이제 그는, 회심의 시 한 편을 쓴다. 텍스트처럼, 사각의 ‘방모양’을 형상하여 점 하나를 찍는다.


■ 맺는말


「사각」이란 점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를 살폈다. 「아침 6시는 백지다」 등 실험 작품들이 있는데 눈여겨봐야 될 현대시들이다. 그의 시들을 보면 ‘시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혁신해 가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다. 그는 이 과정을 반복(피드백)하게 될지 모른다.

5년이란 세월, 송시월이 절망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은 세상에 ‘디지털리즘’이 공인되지 않았다. 그 선언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이 시집은 디지털리즘의 기수旗手가 되는 셈이다.

여기 「개혁이란 스스로 자기 살가죽을 벗겨내는 것」이란 말을 덧붙여 둔다.

2005. 신춘





선언의 서(序): 「디지털리즘 문학선언」의 序, 인체의 신비전에  서 유리판 위에 놓은 신체의 절편을 보고 쓴 내용

출처 : 디지털시-첫나비 아름다운 비행
글쓴이 : 글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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