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시,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 / 이재식

자크라캉 2006. 3. 1. 20:09

시,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 / 이재식

 



저자가 그러했듯, 다른 시인들도 시 쓰기를 시작했을 무렵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답답했을 것이다.
이런 숨막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선생님들께서는 시 쓰는 방법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으셨다. 겨우 어떤 시집을 읽어보라는 말씀이 가르침의 전부였다. 시집은 물론 시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시원한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거의 만용에 가까운 의욕으로 시에 매달려 왔고 그렇게 다섯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제서야 내 물음에 대한 선생님들의 답변이 왜 침묵으로만 일관하셨던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작품은어떤 공식에 대입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여 년 시를 써온 나의 경험과 그 동안 나와 함께 시 공부를 해 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어려움과 그 해결책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다.
시에 대한 잘못된 편견, 시의 뜯어읽기, 시를 쓰기 위한 깊이 생각하기, 시의 올바른 표현, 이미지 생성과정 등. 시인이 되기 위한 준비와 공부 방법들을 정리했다.

아직은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들은 시 공부를 해 온 동안 얻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마다 찾아낸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책의 내용은 첨삭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세상은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이 책의 묶음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제 값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1.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다.

시는 천부적인 시적 재능이 있거나 특별한 사람(시인)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시인인 사람은 없다. 물론 다른 분야 즉 역사나 과학 또는 수학보다 말과 글에 더욱 관심과 소질이 있는 사람은 있다. 수학이나 과학 또는 물리학에 뛰어난 사람이 있듯이….
물리학이나 수학에 남다른 우수성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평소의 생각이 그 쪽으로 꽉 차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도 같다. 다른 쪽보다 문학에 관심이 있고 재미있어한다는 점이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시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애인과의 지고한 사랑도 처음에는 서로의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상대를 탐구할수록 매력을 느낄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열애의 행복을 가질 개연성이 높다. 시도 같다. 관심도 없으면서 '시인' 이라는 또는 '시' 라는 작품만 가지려 한다는 것은 호랑이는 무섭지만 그 껍질은 욕심이 나거나 심하게 말하면 '문화의 허영이나 짝사랑' 과 다를 바 없다.
'미인을 얻기 위해서는 용감해야 한다' 는 말이 있다. 상대가 감복할 때까지 구애해야 한다. 스토킹까지야 안되겠지만 지극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
이런 때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 는 말은 제 값을 한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시인될 소질이 다른 민족에 비해 높다는 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풍부한 정서가 있고 여린 심성이 있으며 넓고 깊은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한국인이라면 일단은 시인될 요건을 타민족보다 더 갖고 있는 셈이 된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시에 관해 질문해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시' 란 특별한 사람들만의 몫으로 미리 정해 놓고 자신을 그 자리에서 제외시킨다. 이런 부정적 무의식의 잠재는 시를 쓰고 시인이 되고 싶은 욕망과 부딪혀 갈등과 스트레스가 된다. 이쯤 되면 시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 시를 쓰지 않아도, 더욱이 시를 알 지 못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사상과 감정)을 나타낸 글 중 산문(줄 글, 이야기 글)이 아닌 운문(마디 글, 리듬 글)으로 된 형태면 모두 시이다. 그러므로 그대도 시를 쓸 수 있고 또 시의 형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좋은(잘된) 시를 못쓴다는 것이다. 시를 못 쓴다는 것은 '성공한 시(잘 써진 시)를 쓰지 못한다' 의 다른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하지도 않은 채,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일정한 습작기를 거치지 않고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단 몇 권의 시집, 심지어는 몇 편의 시만을 읽어보고 나도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써본다. 잘 될 리가 없다. 몇 번인가를 시도 끝에 '나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고 결심(?)하고는 스스로 포기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포기에서 그쳐지지 않은 모양이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잘 쓰지 못했던 사람들일수록 기성시인을 우러러보며 상대적으로 자신을 비하시킨다. 이것이 스트레스다.
처음부터 좋은 시, 잘된 시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스스로를 볶는 결과가 되고 스트레스를 만든다. 약간의 오기와 함께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그래서 세상의 시들을 흉내내기 시작한다. 창조의 즐거움보다 결과만 탐내어서 남의 것을 모방하게 되고 얻어들은 지식들을 나열하거나 자신의 감성과는 무관한 표현으로 허황하게 써놓고는 그것이 잘된 시려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터무니없는 오해다.
우리는 일상에서 잘된 시와 덜된 시를 많이 접할 수 있다. 잘된 시를 볼 때 '이 시인에게는 남모를 특별한 묘법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있기는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썼다는 노력의 묘법이 그것이다. 이 세상에 시작법의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란 이런 것이다' 를 말할 수 있다면 그 뒤부터 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머 이후로 시작은 계속되었고 시인도 계속 탄생했다. 그러므로 모방은 자신의 것도 비슷한 정답도 아무 것도 아니다. 더욱이 시는 사물과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어느 천재가 있어 그 사물에 대한 시는 '이것이다' 라고 했고 그것이 정답이었다면 그 사물에 대한 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시가 창조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상황은 보는 이에 따라 그 시각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시가 나올 수 없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

소설, 희곡 등도 언어를 도구로 하는 예술, 즉 문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굳이 시, 소설, 희곡 등 장르를 구분한 이유는 사고와 표현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소설적, 희곡에는 희곡적(장면연상) 특성이 있는 것처럼 시적 표현(글쓰기)이 요구하고 있는 바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요구가 곧 시에 대한 전문용어 습득이며, 그 운용인 이론이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아 왔던 어떤 사물이든 그것의 본질을 보도록 노력한다. 또 왜 그것이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자신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다른 사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사고하는 능력과 사물의 내면을 볼 수 있는 투시력 그리고 상상력의 훈련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와 태도가 곧 좋은 시를 쓰는 법일 수는 없다. 방법일 뿐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방법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남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처음부터 그 아류에 휩쓸리겠다는 다른 말이다.
시각과 생각과 정서와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나만의 방법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미 남들이 해놓은 해석과 의미 규정은 그 자체로 끝난 것이다. 따라서 남을 베끼는 일은 이미 있었던 것을 확인하는 표절일 뿐 그 이상 의미는 없다.


3. 시작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시에 젖어 살기

전문용어와 운용방법을 공부한 후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고' 에 부지런하다해도 꼭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시속에 젖어 있어야 한다. 곧 몰입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에 젖어 살기' 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지 않아도 된다.
당구나 바둑을 처음 시작할 때 두 눈을 감고 있어도 '공' 과 '돌' 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또 평소 그리던 이상형의 이성 친구를 만났을 때, 자신의 머리 속이 온통 그의 모습으로 차 있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잘 알 것이다. 그렇다. '젖어 있다' 는 것은 '빠져 있다' 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젖어 있는 것' 은 당구나 바둑, 이성 친구에게 '빠지는 것' 처럼 시를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쓰는' 동안에 자연히 '젖게' 된다.
결론 삼아 말하거니와 시는 선천적이 아니다. 오히려 후천적이다. 그러므로 노력이 성공의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말이다.


4. 시 공부의 단계와 과정

희곡 → 정형시 → 자유시 순으로 권한다.

시 공부를 하려는 사람에게 희곡의 개요를 졸업하라는 이유는 순전히 구성 때문이다. 희곡은 작은 사건과 에피소드가 서로 맞물려 전체라는 구성체를 이루고 있다. 어떤 사건의 결과는 그 결과를 낳게 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만드는 데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따라서 그 중 어느 하나만 빼버리면 이야기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만다. 시도 같다. 어느 행, 어느 연을 빼버리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시는 단어, 행, 연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 단어나 행을 집어들면 전체가 따라 올라와야 한다. 마치 그물망처럼…. 이를 구성이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은 희곡에서 배울 수 있다.
다음 단계로 정형시(시조)에 몰두하라는 이유는 축약과 생략 때문이다. 시는 산문과 달리 산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두 전달하면서도 산문보다 100배, 1,000배 짧게 써내야 한다. 이른바 응축이라 한다. 정형시(시조)는 3·4조의 경우 45자 내외에서 의미전달이나 메시지를 모두 끝내야 한다. 시가 요구하는 축약의 묘를 공부하는 방법이다.
이 과정을 어느 정도 끝낼 수 있을 때 자유시로 진입하는 것이 시 공부의 올바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