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詩들
안도현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80년대 시인들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90년대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본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만 보려고 하는 90년대적 세상 읽기 방식이 나를 슬프게 한다. 거기서 싹트는 새로운 상투성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가며 보자. 때로는 그 따위 것들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자. 광장이 지겹다고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야 쓰겠는가.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어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나를 슬프게 한다. 또한 시인이란, 감정의 물결을 슬기롭게
조절하면서 헤쳐 나갈 줄 알아야 할 터이다. 시란 깊은 강물 위의 노젓기와 같아서 감정을 밀었다가 당기고, 당겼다가 미는 데서 그
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뱅뱅 도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뒤가
보이고, 뒤로 물러서야 앞이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술을 먹지도 않고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시가 있다. 아침에 한 말을 저녁에 또
하고, 3년 전에 한 말을 5년 후에 또 되풀이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수많은 '역전앞'과 '고목나무'와 '서해바다'와
'풀장'의 동어반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밤톨만한 돌멩이에다가 설탕물을 바른 시도 나를 슬프게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랴마는, 암컷과 수컷의 달콤한 속삭임만 옮겨 적는 대필자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모든 암수가 밥을 먹고 똥을 싼 뒤에 짝짓기를 한다는 사실은 왜 관심을 두지 않는가. 때로 사랑도 독약이라는 것, 희망도
아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가.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다. 구체성의 습지에
몸을 비벼댄 흔적이 없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미당의 시에 나오는, 옛날의 '누이의 손톱'보다 나는 말년의 '할망구의 발톱'이 더
좋은 것이다. 누이는 재기 넘치는 허구이고 할망구는 깊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시들을 앞으로도 내가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는 일은 나를 슬프게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이제까지 낸 시집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너무
많은 언어를 함부로 다루었구나. 시집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나무들한테 지은 죄 크구나. 모든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낳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오늘 다시 뉘우친다. 뉘우침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순도 백 퍼센트여야 한다. 그럼에도 내 뉘우침은 뼈가 아프도록
간절하지도 않고, 다만 묽고 싱거운 것 같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