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나는 열애 중입니다 - 심은섭 시인

자크라캉 2020. 3. 24. 23:47


                                               -〈사진 : http://blog.daum.net/crux3159/13471179에서 캡처〉




는 열애 중입니다

 

 

심은섭

 

 

 

얼굴 없는 낯선 바람이 개찰을 한다 목숨의 탑을 완성한 늙은 사자 한 마리, 강릉역 1번 입구 지하플랫폼으로 계단을 밟으며 내려간다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함박눈이 거리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그의 국화꽃 지문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손금과 손금이 교차되는 지점에 서있는 보릿고개의 아우성과 동굴벽화에 사는 들소의 한 숨을 기억하던 일이거나 어둠에 광두정을 박고 조등을 걸어놓던 일이며, 봄을 잃어버린 두견새의 울음을 화선지에 그려내던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회색빛 표정의 오후 3, 낯선 레일을 따라 달리던 열차가 물개의 울음소리 같은 기적을 울리며 둥근 발을 망각의 강에 적신다 오랫동안 내가 하현달로 피어있는 지상으로 한 줄의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지만 나는 아직도 그와 열애 중이다

 

 

 

 

*출처: 2020년 계간지 시현실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