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2011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끈/정영희

자크라캉 2011. 1. 7. 11:48

 

 

 

[2011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끈/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