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2011년 문화일보신춘문예시부문 당선작]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강은진

자크라캉 2011. 1. 2. 21:23



 

 

 

 

[2011년 문화일보신춘문예시부문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약력]
<이력>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졸업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당선소감]

절실하게 시작했던 글쓰기… 절박해지긴 싫어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노트북을 짊어지고 다녔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쓰면 언젠가 나도 소설을 쓰게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표를 찍은 글은 한 편도 나오지 않고 오른쪽 옆구리만 결리기 시작했다. 허리 병이었다. 무거운 걸 한쪽 어깨로만 들고 다녔기 때문이란다. 양 어깨로 가방을 메고 다니라는 처방을 받았다. 양쪽 어깨를 사용할 즈음 봄이 왔다. 허리 병이 가시자 소설에 대한 열망이 밀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신춘문예는 유일한 해열제처럼 여겨졌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난 후, 보름 남짓 잊고 지냈다. 그런데 '그 날'의 전화를 받고 난 후, 고작 일곱 정류장의 거리를 이동하며 지하철에서 세 번 내렸다 다시 탔다. 절실하게 바라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절박해지기는 싫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한눈 팔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바라는 것을 하고 있어서, 그 길이 영 틀리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방 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았다. 고집스럽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변함없이 믿고 기다려주신 아빠, 엄마, 감사합니다. 유일하게 나와 같은 유전자 조합을 가진 현정언니, 고마워. 음악처럼 위로가 되어준 동연언니, 허리 병 초기증상인 영은, 사랑한다. 나의 이십대 전부인 네마들, 안녕.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해준 소행성 문우들과 미숙한 제자에게 항상 용기를 주시는 박상우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마지막까지 붙잡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채워나가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황동규(오른쪽) 시인과 정호승 시인.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