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국「하염없이 붉은 말」(천년의시작, 2007)
1. 색깔의 존재성
사람들은 특정한 인물에게 특정한 색을 부여하기도 한다. 색깔이 확실하다고도 하고, 흐리다고도 한다. 정치계에서도 색깔론이 운운하는 걸 보면, 색깔은 사람의 특색을 표명하지만 사람도 하나의 사물일 수 있다는 관계로 트이기도 한다.
박종국은 인간과 색깔의 관계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그의 시는 독특한 방법으로 ‘색깔의 존재론’과 ‘존재의 색깔론’을 ‘색깔 있는 시’로 그려내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형태가 있지만 그 형태만을 가지고는 어떤 느낌을 받지 못한다. 거기에 색깔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개성적인 존재로 가시화될 수 있는 것이다.
박종국의 시는 사물의 이미지가 색이 있어 존재성을 획득하는 ‘색깔의 존재성’과, 색깔의 궁극적인 의미인 ‘존재의 색깔론’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의 존재를 색깔의 존재성과 결부시켜 은유화하는 것이다.
색깔은 마음의 언어
다 표현할 수 없는 無窮이다
무궁으로 이어지는
비밀한 색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초입부터 먹고 먹히는 세계
먹기 전보다 먹고 난 다음
더욱 허기져 짙어가고 있었다
탄식과 울음소리 고함소리
캄캄한 하늘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람에 휩싸인 색깔들의 얼굴
피투성이였다 생존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모래알 같았다
눈물과 섞인 피가 발밑으로 흘러내리자
걸신들린 듯 벌레들 빨아먹고 있었다
솟구치는 두려움 등에는 식은땀 흘렀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분명 깊은 산골짜기였다
끝없는 아비규환 일어나고 있지만
슬픔도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색깔」전문
“마음의 언어”인 색깔은 시인의 보편적인 자아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궁”이고 인간의 비밀한 세계다. 색깔의 “아비규환”은 인간 삶이 곧 “끝없는 아비규환”이며 “관계가 깊어갈수록 짙어지는 색깔들” 역시 인간의 관계와 같다. 인간의 비밀 세계를 드러내다 보면 “탄식”과 “고함소리”, “피투성이”의 삶이 드러난다.
색깔도 드러내려면 그래야한다는 색깔의 주관화는 박종국 만의 색깔이다. 그는 색깔로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은 사물과 공존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사물의 이미지화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물화로 인간은 자연과 동일시된다. 이때 우주를 만나 개성적 보편적으로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초록이 세상 여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부등켜안는 소리, 쌓인 눈길을 가는 동안 누구도 알려주지 않던 겨울 끝자락에서 내 눈을 찌르며 돋아나는 초록, 가슴을 저리도록 흔드는 한 방울 빛으로 연초록으로 봄눈을 틔웠습니다, 토란잎에 떨어진 물방울같이 또록또록 구르고 있었습니다, 양지에 핀 쬐그만 꽃같이 눈에 박혔습니다, 끝까지 매달렸다 초록의 잎눈에 밀려나 허공을 한 바퀴 도는 공중제비 하는 낙엽의 마지막 불안 속으로 굴러다녔습니다, 땅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제 색깔만으로 가득 찬, 비천한 일말의 양심같이 내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눈시울, 온몸을 조이는 붉은 말, 어둠과 밝음의 대립은 잎눈과 꽃눈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 눈동자 파아란 하늘엔 기러기 한 쌍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붉은 말」전문
인간 세상을 평가절하 하는 말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인 사물의 결합을 존재의 색깔론으로 극복해내려는 사물의 색깔론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색깔의 본질’은 ‘사물의 색깔’로, ‘색깔로 존재하는 형태’는 ‘색깔로 열고 닫음’이다.
박종국은 ‘색깔로 열리는 우주’를 탐사한다. 은유적 색깔의 탐사를 넘어서서 소리로 인간의 오감을 드러내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삶과 외경의 봄은 “연초록” 우주로 열린 우주가 들어있다. “연초록” 색깔로 “봄눈을 틔”우듯 저절로 존재하는 우주의 색깔이 있다는 것이 이 시의 메시지다.
2. 존재의 색깔론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박종국 시의 가치는 자신만의 색깔의 세계를 구축하는 치열한 사유다. 인간의 삶을 색깔을 통해 바라보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하염없이 붉은 말>은 존재가 색깔로 완성되는 전형적인 서정시다. 너무 색깔에 치우쳐 있어서 세계가 평이하고 협소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어두워진다는 것은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네
잦아드는 것이네
붉은 저녁노을 외치는
소리 따라 물결 따라 가는 것이네
무더운 여름밤 건너가 듯
오늘과 내일의 벽을 넘어가는 것이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네
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검정색같이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네
단단해지는 것이네
검정색 밀도가 최고로 높아지면
제 색깔 놓아버리고
스스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듯
어두워진다는 것은
어둠을 풀어헤칠 여명이 되는 것이네
-「어두워진다는 것은」전문
이 시에서 박종국은 아이러니한 구조로 “어둠을 풀어헤”치는 것은 “여명”에 이르는 길, “어두워진다는 것은” 비로소 색깔을 재생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빛과 어둠이 순환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성으로 인간의 존재성을 의미한다. 빛은 색깔(어둠)로 색깔은 빛으로 순환하는 우주의 고리가 색깔로 인간의 삶을 투사한다.
이와 같은 발견적인 세계 인식은 박종국의 무의식의 세계이며, 근원적 보편적인 것으로 동일화하는 우주는 박종국의 의식의 세계다. 그것이 색깔로 표현된 것이 박종국의 시세계이며 존재의 색깔론이다. 결국 색깔로써 우주의 인식을 현현하면서 자신의 총체적 시선을 ‘경전’으로 완결해 내는 것이 그의 시인 셈이다.
하나하나의 색깔이 모여
숲을 이룹니다
전체와 부분이 살아 굽이치는
아름다움, 색깔이 만듭니다
자신의 특성대로 살아가는
충실한 삶의 결과입니다
제 바탕의 완성을 위해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끊임없이
요동치는 색깔, 경전을 모릅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제 삶을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
앞과 뒤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현재의 삶에 몽땅 투자하는
그것이 흔들리는 것들의 꽃을 피웁니다
땀 냄새 물씬 나는 색깔,
내가 읽는 경전입니다
-「色經」전문
자연은 자신의 특성대로 살아가는 게 우주의 진리다. “하나하나 색깔이 보여서 숲을” 본다. 박종국의 색깔에 대한 결론이 여기에 담겨 있다. 사물은 형태보다 색깔로 이루어진다. 제각각 존재에 이르는 색깔의 메시지는 인간의 보편적 삶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보편적인 길을 열어주는 사물의 형태를 견인해서 “꽃을 피”운다. ‘색깔의 존재론’이 ‘존재의 색깔론’으로 고양된다. 경전으로서의 우주에 대한 외경이 박종국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박종국의 첫 시집에서는 색깔 의식이 30% 정도를 차지했지만, 2시집인 <하염없이 붉은 말>은 색채론으로 완성되었다. 다음 시집은 어떤 시들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색채 상징을 빼고 이 시집을 보면, 다소 평이한 서정 시편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도 주어져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이번 시집은 그가 구사한 ‘색깔’이라는 시적 장치가 시단의 차원에서 얼마나 개성적이면서도 큰 가치를 지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첫 시집에서는 2시집의 요소가 보였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다음 시집의 요소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난점이다. 다시 말해서 박종국 시인이 이번 시집을 바탕으로 다른 세계로써 도약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그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당면한 현실이자 과제인 셈이다.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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