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 소고
-포스트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 해체를 중심으로-
김상현('93)
지난 30년 동안 세계 문단과 학계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각
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아
직 막연한 것처럼 보여지며, 아직 확연하고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고도로 복잡한 다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런 이유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무거운 부담감으로 느껴지며, 따라서 포스트 모더
니즘의 발생 배경과 그것의 일반적인 특징 속에서 청교도 사회에서부터 나타난 서구의 이분
법벅인 사고를 비교, 비평하고자 한다.
'포스트'단절인가, 지속인가. 절충인가
서구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문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몇몇 문화 이론가들에 의해 처음엔 생소하고 어색하지만 그것을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고 불렀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사 때문에 그것이 모더니즘의 단절
인가, 지속인가, 아니면 절충인가 하는 논쟁의 여지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에 대한 의
견의 일례로 레이스 휘슬러,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스, 리처드 로티 등은 모더니즘
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하나의 단계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고, 반면 영국의 마르크스 자인
페리 앤더스은 '포던'과 '포스트 모던'이 궁극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같은 용어라고 파악한
다. 그러나 이합 핫산, 말콤 브래드버리, M. H. 에이브럼즈, 안드레아스 후이센과 같은 학자
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지속인 동시에 단절의 현상으로 파악하는 다분히 절충
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 간단히 각각 단절, 지속, 절충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선 마르크스주의 문학가인 제임슨을 살펴보자. 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저서 '후
기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3단계로 나눈 것을 응용하여 20세기 전반부를 모
더니즘 시대와 연결시키고 후반부를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와 연관시킨 그는 "포스트 모더니
즘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대체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어떤 근본적인 시작이나 단절
이 있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이 "단절은 백년동안 지속되어 오던 근대 운동의
쇠퇴나 소멸"에서 연유된다고 주장한다. 즉 제임슨에 의하면 다국적 기업을 근간으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영역 자체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의 두 현상은 의미와 사회적 기능에서 완전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
럼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의 시대구분을 따라 18세기 말의 최초의 산업 혁명 이후의 자본주
의적 생산 양식에 의하여 생성된 기술상의 3가지 혁명을 구분하고 있다. 1848년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생산과 더불어 시작되는 시장 자본주의의 시기를 리얼리즘과 연결시키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1890년대의 전기 및 연소 기관의 기계 생산부터 시작되는 독점 단계 또는
제국주의 단계를 모더니즘과 연계시키고 있다. 1940년 이래의 제 3단계는 더욱 '순수'해진
자본주의의 단계O인 후기-다국적-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TV, 비디오, 컴퓨터 등 전자 및
핵동력 장치들의 기계 생산과 관련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규정짓고 있다. 즉 포스트 모
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어떤 근본적인 변이 위에서 생겨난는 필연적인 문화 발
전의 단계라는 것이다.
다음은 지속이라고 주장하는 제랄드 그라프의 견해를 살펴보자. 낭만주의 시대부터 시작
되는 서구의 현대문학/예술의 발전 양상의 개념을 예술사적으로 접근하여 서술하고 있는 그
라프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가정에서 급전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이전의 움직임들의 논리적인 절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50년대와 60
년애의 네오 아방가디즘적인 항거는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혁명으로 보
기보다는, 일찍부터 허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색채를 띠었던 모더니즘 경향의 지속으
로 파악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충동이 일상 생활에 만연됨으로써 일어난 것으
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절충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합 핫산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지난 100년
간의 예술상의 3가지 변화 양상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첫째, 20세기 초반부를 동요시켰던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예술지상주의, 구성주의 등의 전위파 시기와 둘째로
모더니즘시기, 그리고 모더니즘과는 대조적으로 장난스럽고 병렬적 관계이며, 해체 주의자들
과 같은 인상을 주고 차분하며 대중사회와 전자 사회에 더 친근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구
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구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의 유명한 논문인
"postmodenism : A paracritical Biblography"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계를 도
시주의, 기술주의, 비인간화, 원시주의, 에로티시즘, 도덕률, 실험주의 등 7개의 커다란 범주
로 나누어 이들 가운데 서로 같거나 다른 점을 분별해 내었다. 다시 말해 핫산은 모더니즘
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존재를 위해 필연적인 선사를 제공하며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하여금 모더니즘 자체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그 단절성에 대한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포스
트'의 대한 논쟁은 지면상 이만하고 어쨌든 분명히 문화 전 분야-건축, 언어학, 문학, 음악,
무용, 미술, 철학, 과학, 기술, 정치, 경제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현상이 조금씩이나
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미국적 현상인가 범세계적 현상인가
그럼 포스트 모더니즘을 서구 특히, 미국에서의 현상으로만 생각해야 할까? 프랑스의 사회
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미국(1988)'에서 미국은 기원의 문제를 회피한다. 미국은
어떤 신화나 근거를 장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없고 기초적인 진리도 지니고 잇지 않
다. <......>미국은 정체성의 문제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앞으로 미래의 권력은 그런 상황을 충
분히 이용할 줄 아는 기원과 정통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속하게 될 것이
다."라고 하며 미국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의미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바 있다. 비록 포스트 모더니즘은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태리, 일본 등지에서 제각기 자구그이 문
화 상황과 관련 지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된지 오래 되었고 많은 논지들이 나오고 있으며 많
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미나나 학회가 도처에서 자주 열리고 있다. 게다가 프레드릭 제임슨
은 우리 나라 출신의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과 타이완의 현대 작가 왕웬싱을 매우 중요한 포
스트 모더니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 모던이라 일컫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목소
리와 원리들이 포용되고 통합되는 시대의 문화 현상-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이 현상을 약
간 막연하지만 거대한 특성인 불확정성 Indeterminacy로 보고 있다-을 생각해 볼 때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국제적(범서구적)현상으로 파악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서구의 지적, 정신적인 역사는 최근까지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를 토대로 하는 18세기의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성, 지식, 진보, 자율성, 자유, 과학과 철학
등의 개념들이 특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20세기의 진부한 이론을 다시 들추어보자. 다윈은 진화설을 내세워 신과 우주와 인간 관
계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종교적, 정신적 가치 체계를 흔들어 놓았고 니체는 19세기 말엽에
계보학을 내세운 최초의 해체 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상부 구조라는 모든 문명의 건축물
밑에 깔린 물질의 토대를 둔 하부구조를 들추어내었고 역사의 발전도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
거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프로이드는 자아와 주체에 대한 안이한 신념을 송두리째 와해시
킨 무의식의 개념을 체계화하였다. 최근에는 과학계에서도 닐스 보어의 상보의 원리, 아인쉬
타인의 상대성 원리, 최근의 양자 역학 등 서구 과학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런 이성과 과학과 진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신념은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핵전쟁의
위협, 무절제한 생태계 파괴, 공해 문제, 마약의 위협 등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니체, 프로이드 아래로 서구인의 자아와 주체에 대한 데카르트적 철학
과 윤리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서구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소
외되었던 여성과 제3세계인들에 의해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의 이성, 논리, 자아가 지배와
종속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음이 폭로되고 있다.
이성과 진보가 지닌 해방적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이제 문명 비판의 목표가 되었다. 이러
한 철학의 해체 또는 재구성을 하는데 있어서 급진적인 지적 접근은 청년운동, 에너지 위기,
경제 불황, 자연보호 운동, 여권 운동, 반핵·반전운동 등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서구의 문화
위기 또는 변모-즐, 모더니티의 위기 또는 모더니즘의 종말-는 후기 산업 사회와 후기 자본
주의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국지적이거나 지방적이라기 보다는 적어도 범
서구적인 현상이라고 보는데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질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 일컫는 현시대의 background를 부족하나마 살펴보았
다. 그럼 좀 늦은감 속에 확실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만약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
즘과 변별적으로 구분된다고 한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은 탈중심화(脫中心化) 현상에 의
해 특징지어질 것이다. 사실상 이 현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라고 할 수 있다. 정전(正典)이라는 말은 원래 기독교적인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나 교회의
법규 혹은 외전(外典)과 대조되는 전통 정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점차로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채 보다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처럼
탈정전화는 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작가의 죽음, 좁게는 학교 교육의 교과 과정의 수
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현상이다. 이처럼 전통이나 인습에 대한 도전
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분열적, 개방적, 부재, 분산화, 병렬적, 불확
정, 성령, 다형성 등-들은 이 특징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서양에서 지금까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로고
스 중심주의 logocentricism에 대한 반발(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나는 점을 실
마리로 하여 얽혀 있는 실을 풀어 나가 보기로 하자. 서양의 중심인 철학 및 사회 체계로서
로고스 중심 주의를 드는 이유는 로고스가 서양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그 이유가 있다. '로고
스logos'라는 단어가 가지는 두 가지 근본적인 의미부터 살펴보자.
'로고스'가 가지는 첫 번째 의미는 '말씀'으로서의 '로고스'이다. 이는 곧 기독교의 근본 사
상이며,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태어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에수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며 신약은 정전으로서 매우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이처럼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가 갖는 절대성을 보장
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말씀을 믿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 나라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하여 이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불타는 장작더미 속에서 불
태워지기도 했다.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이처럼 말소리가 갖는 우위성과 독선을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이름으로 요지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로고스'가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이성reason으로서의 로고스의 힘이다. 이성의 로고스는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를 많은 경우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처음과 끝
이 있다든지, 또는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지음을 받은 것이며, 지음을 받기 위해서는
창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위에서 본 로고스 중심주의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하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의 말씀을 믿고, 이를 따라야 한다. 이를 따를 경우,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행
동을 해야 한다. 말씀을 믿지 않거나 말씀을 따르기 위한 합목적적(이성적인)인 행동을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모두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우선권이 배제된 것들인-'비非말씀'과 '비非목적
성'에 우위를 주는 것이므로 이는 로고스 중심 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한편 로고스 중심
주의는 가부장적인 남성 우위의 사고라는 점에서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phallogocentrism라
고도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신학 체계에서는 신의 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남성이며,
그의 유일한 아들은 예수이다.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은 모두 남성이며, 예수를 배반
한 유다 까지도 남성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바로 로고스 중심 주의에서 우선권이 주어
진 말씀-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복음'gospel과 '소리중심적'photogenetic인 말을 모두 포
함하는 의미로서의 말씀-합목적성등 로고스의 특징적인 면과, 이에서 유추되는 남성, 작가,
아버지 등의 우위를 부정함으로써 수평적(병렬적)인 관계로의 변이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
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로고스 중심 주의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던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자 하는 데에 이의 특징이 잇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남
성/여성, 작가/독자, 이성/감정, 위/아래 등의 우위의 위계를 깨뜨리는 것을 바로 이러한 포
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이기도 하다.
구조주의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적 경향 즉, 포스트 모더니즘의 복합성과 다원적 구조 속에서 문학
계는 모더니즘 시대에 비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가 어떤 차이점을 나타내는지
'언어는 중심이 없다'-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진 이상, 이제는 어떤
지시어의 의미의 중심은 아무 데에도 없게 된 셈이다. -는 탈 구조주의, 특히 프랑스 학자
인,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이분법의 탈피라는 관점에서 살펴
보겠다.
탈 구조주의 poststructuraism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조주의와 탈 구조주의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960년대에 프랑스를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은, 우선은 그것이 '언
어'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구조주의의 언
어학적 배경은 언어의 사회적 체계를 의미하는 랑그 Langue와 개인적 발화를 의미하는 후
자가 아닌 언어의 사회적 체계를 의미하는 전자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스위스 언어학
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관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곧 언어 자체만
이 아니고 다른 모든 문화, 사회 체계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처에 숨어 잇는 어떤 공통된 체계나 법칙, 또는 틀을 찾으
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그 특성 자체가 처음부터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우선, 개개의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
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키려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구문'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
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엄격함을 주장하는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
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구조주
의는 또한 어떤 규칙이나 틀을 찾아내려는 과학적 태도를 갖고 있음으로 해서 늘 인간을 규격
화하고 조직화하며 패턴화하려는 위협적인 존재로서 등장하게 된다.
셋째, 구조주의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체계를 분리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를 무시
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려는 비인본주의적·비실존주의적 태조를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모든 것의 근원이나 중심이 되며 '개체'에 대한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랑그/파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지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의 근원이나 중심이 되며 '개체'에 대한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비록 지시 기호와 지시 대상의 사이가 필연적이 아니고 임의적인 것이라
인정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재현 가능성을 믿었던 낙관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것의 근원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언어 체계는
곧 기호 체계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 기호학적 특성을 띠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호의 재
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탈 구조주의-해체이론을 중심으로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미 강력하게 부상
하기 시작한 탈 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하는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평하면서
등장했다.
1966년 10월 18일에서 22일 까지 열린 미국의 존슨 홉킨슨 대학에서 열린 '비평의 언어와
인문학'이라는 주제의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당시 유럽의 지성계를 대표하던 구조주의학자들
이 대거 참여하여 발표와 토론을 가졌다. 그 심구 문단과 학계를 풍미하던 구조주의와 구조
주의의 연로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날카롭게 비판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젊은 학자가 바로 후에 해체 이론을 창시한 자끄 데리다였으며 그 논문
이 바로 유명한 '인문학의 어술행위에 있어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es of Human Sciences였다. 프랑스로 돌아간 바로 'De la
grammatologie, La voix la phenomene-를 출판하여 해체 이론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탈구조주의에 속하는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우선 서구의 형이상학이 기본적으로 '말'중심
주의logocentrism -글 writting보다 말speech을 더 중요시하는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전
제하에서 시작된다. 즉,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우리가 '말'할 때는 화자와 청취자가
현존 presence해 있으며 화자의 현재 생각을 바로 그 자리에서 전달해 주는데 반해, '글'은
화자와 청취자의 부재absence속에서 이루어지며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원
래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의사
소통 방법인데 반해, '글'은 인위적이고 간접적인 말의 재현representation에 불과하다는 편
견이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셈이 된다. '글'에 대한 서구 사상의 이러한 편견은 우선 두 가
지 문제를 제시한다. 첫째, 서구의 '말' 중심 주의는 '글'에서와는 달리 '말'에 있어서는 의도
와 의미 사이 또는 지시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둘째,
음성이라는 기호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 presence를 믿는다는 것이
다. 데리다는 우선 '글'뿐만 아니라 '말'의 의도와 의미 사이에도 거리와 차이, 단절이 있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절대', '진실', '근원', 혹은 '중심'의 부재를 주장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
의 낙관주의를 뿌리에서부터 해체한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말'보다 '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말'과 '글'은 특권/억압의 관계가 아니
라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영향적이며 본질적 및 숙명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말'은 '글'을 전제로, 또 '글'은 '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영역을 '차이'
만으로 간단히 규정지을 수 없으며, '차이'와 '유보'의 이중 개념에 입각해서 바라보아야 한
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반기를 들고
잇는 셈이다. 데리다는 또, 서구 사상이 지시 기호/지시 대상, 심층구조/표면구조, 말/글, 근
원/파생, 중심/주변 등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며, 사실 상반되는 것
처럼 보이는 이 두가지 요소들이 상반되면서도 동시에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
문에 이와 같은 이분법적 태도는 오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류는 공통된 언어라는 매개
체를 쓰는 이유로 해서 부지불식간에 의해 작품 속에 주입되기 때문에 성실한 독서를 통해
그와 같은 오류-'현존'에 대한 착각과 이분법적 사고방식-를 찾아내고 그것이 사실은 불안
정하고 전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해체 이론의 기본 작전이 되는 것이
다.
자끄 데리다에 의해 시작된 해체 이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우선,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이래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의 당위성에대한 강력한 의
문과 도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서구인의 심층의식이나 서구 사상의 근저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그 중 하나에 우선권 또는 특권을 주는 '이분법적 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말/글, 이성/광기, 문명/야만, 내부/외부, 남/여, 자신/타자, 선/악, 백/흑, 빛/어둠 등
이 그 대표적 예인데, 서구인들은 둘 중 첫 번째 것에다가만 우선권을 주고 둘째 것은 이차
적인 것 또는 오염된 형태로 '제외'시켜 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같은 짝짓기를 '폭력
적인 서열 제도'라고 부르며, 첫 번째 것으로부터 특권을 박탈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데
리다가 시도하는 이 '서열의 전도는 단순히 두 번째 것에 특권을 부여하여 첫 번째의 위치
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폭력적인 서열 제도
'를 만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전략은 보다 복합적이고 미묘해서 , 두 번재 것이
첫 번째의 위치로 올라오는 순간 이번에는 그 새로운 것으로부터도 특권을 박탈한다. 그러
므로 데리다의 이론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자리바꿈'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데리다의 해체 이
론은 바로 이 부단한 '자리바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말을 바꾸면, 데리다는 이 모든 이
항 대립적 요소들이 서로 배타적이고 상충적이라기보다는, 사실 서로 대체될 수 있고 또 서
로 보충될 수 있는 '상호보완적'존재라는 인식을 토대로, 이 두 요소 사이의 서열과 경쟁을
무너트리고 자유로운 '치환'을 허용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해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
이다. 물론 그것은 두 요소 중 어느 쪽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
다. 어쨌든, 해체주의의 기본 태도는 기존의 억압적인 전통, 교권주의, '근원', '중심'등에 대
한 도전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이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에 가장 강력한 선구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니체일 것이다. 니체
는 '개념'의 형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찍이 절대적인 '근원'에 대한 불신과 끝없이 서로 다
른 개념의 '차이'를 주장하였다. "올바르고 믿을 만 하며 곧 충실한 오리지날 형태"란 없기
때문에 '진실'과 '근원'이란 사실 착각에 불구하며, 따라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파
괴될 수 있는 진실'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의 이와 같은 사상은 곧 독선적인 서구의 형
이상학 또는 그가 'morality'이라 부르는 관습적 사고 방식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어 진다.
관습적인 '모럴러티'에 대항하여 선악을 초월한 'extra morality' 속에 살며, 우상과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가 탄생할 새벽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에게 디오니소스적인 희열을 가
져다준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해체 이론에 대해 '미국에서의 해체 이론'이라는 글을
쓴 로버트 앨터는 해체 이론이 미국에 끼친 좋은 영향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첫째
는 해체 이론이 미국인들에게 철학적 사고 능력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고, 둘
째는 해체 이론이 문학작품의 의미는 통일되어 있고 단일하다는 기존의 전체에 대해 '건강
한 회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앨터의 첫 번째 의견에는 약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두 번째 지적은, 해체 주의가 미국에서 환영받고 있는 가장 근
본적인 이유로 그 이론이 바로 '권위에 대한 도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맥락에
서 볼 때, 설득력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모비 딕'
해체이론이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서구의 형이상학 및
사고 체계의 독선과 횡포에 대한 의문과 반성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라면 문학작품 속에 나타
나는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공부했던 멜빌의 '백경'Moby Dick(1851)의 화자 이즈마엘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
다. 이 작품은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고지식한 청년 이즈마엘이 거대한 흰 고래인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항해를 통하여 다양성과 모호성을 포용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소
설이다.
우선 이즈마엘은 피쿼드 호를 타기 전에 뉴 베르포드의 한 여관에서 남태평양에서 온 야
만인 퀘이쿼그와 같은 방안에서 지내게 된다. 기독교도인 이즈마엘은 처음엔 폴리네시아인
이교도의 생활 습관과 우상 숭배가 싫었으나 아래 이즈마엘의 독백에서처럼 점점 그것이 자
신의 근거 없는 편견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이해하게 된다.
<"이 자리의 형편에 있는 자네는 정말 문명인답게 행동하였네." 실제로 이런 야만인에게
남들이 뭐라 하든 내면에 아름다운 친밀감을 갖고 있고 그들의 본질적으로 올바른 예의는
놀라운 것이다......그가 어디까지나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량한 우리의 장로교들은 그런 점에서 깊은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이교도 이
건 무엇이든 간에 다른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미치광이 같은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서 자기들만이 우수하다고 생각해선 안될 것이다.">
<"......자, 퀘이쿼그는 내 이웃이다. 그럼 나는 퀘이쿼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와 같이
기독교 예배 의식에 동참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의 예배 의식에 동참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만 하리라.">
바로 이 순간 이즈마엘은 백인/유색인, 기독교/이교, 문명/야만 등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
에서 벗어나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에이허브 선장의 중요성은 먼저 낭만적인 청년인 이즈마엘에게 현실의 냉혹함과
위험성을 부단히 상기시켜 주는데 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
던 낭만적인 나르시스적 경향을 가진 이즈마엘은 에이허브를 통해 비로소 그 평온하고 아름
다운 물의 표면 속에는 사악하고 치명적인 현실(모비 딕)이 헤엄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이즈마엘은 아름다운 바다를 내려다보며 목가적인 환상에 젖어 있을 때
에이허브가 모비 딕을 처음 발견하는 선원에게 줄 스페인 금화를 돛대에 박는 금속성 소리
가 요란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에이허브의 두 번째 중요성은, 그가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내어 그 베일을 벗기는 것의 불가능함을 이즈마엘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데 있
다. 에이허브는 그 절대적인 존재를 추적해서 대면하고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결국엔 자신이 던진 밧줄에 의해 그 불가사의한 존재에 묶인 채로 죽고 만다. 그러
므로 에이허브를 통해 이즈마엘은 낭만주의/사실주의, 꿈/현실, 광기/정상, 확실/불확실 등의
상호 보존적 속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대중화의 발화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삶과 그 범위, 내구력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심각한 변화가 계속
되어 왔으나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그 변화의 전모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업
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대중 사회'(비록 그 의미는 매우 다원적이지만)의 발흥
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이 용어를 '중심'에서의 탈피, '억압된 것의 복귀'와 연관지
어 생각해 보겠다.
그럼 대중 사회 속에서 1960년대 이후 소설의 대중화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자. 1960년대
는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드는 문화적·사회적 및 정치적 격변기였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60년대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사회 각층에서 급속도로 일어났던 시기였
다. 우선 아폴로호 우주선의 달 착륙이 있었고 텔레비전의 급속도 보급, 장거리 및 국제 자
동 전화의 등장 및 제트 여객기의 등장으로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었으며, 여성 해방 운
동과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 그리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의 등장으로 시민 의식이 고취
되었고, 일련의 정치적 암살, 반전 데모 및 월남전의 참상 등으로 인해 현실 의식이 고조된
때가 바로1960년대였다. 이 거대한 대중 문화 시대에 피들러 같은 비평가는 더 이상 엘리트
주의 모더니즘 소설은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토마스만의 '마의산'
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난해한 소설을 읽지 않으며 평소 대중 문화
의 옹호자였던 피들러로 하여금 그가 소위 '예술 소설'이라고 부르는 모더니즘 소설의 죽음
을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피들러가 선언 및 예언했던 '소설의 죽음'은 결코 소설의
자체의 죽음이 아니라 소위 난해한 아방가르드 소설 그리고 귀족적이고 독선적인 모더니즘
소설의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대중 사회라는 표현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더욱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세분화되어지는,
반은 복지 사회적이고 반은 전체주의적인 비교적 안락한 사회를 의미하게 된다. 그 사회 안
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충성심이나 연대감, 그리고 협력과 같은 개념들이 해이해지거나 그
렇지 않으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고 또한 명확한 이해 관계나 의견에 기반을 둔 일관성
있는 대중이 점차 분파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소비
자로 전락하여 자신이 탐닉하는 생산품이나 오락, 그리고 가치처럼 하나의 대량 생산품의
신세가 되고 만다. 즉, 가정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의 중심지들이 인간에 대한 구속력을 상실
해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적으로 향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회 집단 혹
은 종교 집단에게 합법적으로 그 권리를 양도할 수도 없는, 자유라는 짐을 진 채, 떠돌게 된
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계급적 질서의 붕괴, 탈 중심화로
인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의해 다원화된 대중사
회의 도래와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들-예술가를 사회로부터 격리 내지 소외시키는 사회성
및 현실성 결여,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성, 엘리트주의, 귀족주의, 전통과 과거의 절대적 가치
에 대한 낭만적 향수-을 불신하고 소설의 사회성 및 현실성, 평이성, 대중주의의 추구, 그리
고 전통과 과거와 절대적 가치에 대한 불신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소설의 출현은 당연한 것
이다. 특히 그 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되거나 도외시되어 왔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
를 부여받으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더니즘의 엘리트적이고
전통적인 소설의 쇠퇴와 대중성으로 인한 '주변'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즉, '억압된 것의 복귀'
현상은 우선 무엇보다도 억압되었던 소수 민족의 부상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60년대 초엽부터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과 '블랙파워' 같은 정치 운동으로 말미암아 흑인
의 위치가 상당히 격상되었다.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그 동안 말하자면 서자취급을 받아
온 상태에서 적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흑인 미학'이란 말이 만들어질 만큼 흑인 문학가들의 활약들도 부쩍 많아 진 것 또한 사실
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흑인의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소수 민족의 경우에도 마
찬가지로 해당된다. 예를 들어 인디언 원주민들을 비롯하여 아일랜드 계통의 민족, 동구라파
의 민족, 멕시코 계통의 민족,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과 한국 같은 동양 민족의 고유의 정체
성도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한 청년 문화의 대두 역시
소수 민족의 대두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청년 문화는 일종의 하부 문화로서
그 동안 지배적인 문화로 군림해 온 전통적인 기성 문화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변적인 것의 복귀 현상'이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성
性의 해방'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의 해방 현상이 가장 명시적으로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
로 일어난 영역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페미니즘 운동이나 페미니즘 문
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특징적으로 남성 중심 주의에 기초한
문학 전통이나 이론이었다. 더욱이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의 경우 흔히 여성들은 주
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 이론적 뒷받침을 해준 이론가는 케이트 밀레트이고 그녀는 그녀의
저서 '성의 정치(1970)'에서 그 동안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부장 제도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그 동안 잊혀진 여성
작가들을 새로이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고
전이라고 간주해 온 작품들 속에 얼마나 여성들이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 다음에서 우리는 몇몇 학우들의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을 TV광고와 소설을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살펴보고 비판해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갓 태어나 걸음마 하는 단계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맹목적인 비난
은 피했으면 한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해결하고 판단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출세한 자와 그렇지 못한자, 알게 모르게 행해지
는 권력자의 횡포와 억압당하는 피권력자, 무역 전쟁이라는 슬로건 아래 강대국의 후진국에
대한 무역 제재 등, 특히 현대의 극단적인 종교적 태도-'시한부 종말론'(선택된 자들만이 새
로운 '시작'을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멸망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
라는 포교활동-는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직 공중에 떠 있어 그것이 떨어질지 아니면 더 나아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다시
한번 인류 문명의 '종말'과 '시작'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중
요한 20세기의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 해체를 중심으로-
김상현('93)
지난 30년 동안 세계 문단과 학계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각
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아
직 막연한 것처럼 보여지며, 아직 확연하고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고도로 복잡한 다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런 이유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무거운 부담감으로 느껴지며, 따라서 포스트 모더
니즘의 발생 배경과 그것의 일반적인 특징 속에서 청교도 사회에서부터 나타난 서구의 이분
법벅인 사고를 비교, 비평하고자 한다.
'포스트'단절인가, 지속인가. 절충인가
서구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문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몇몇 문화 이론가들에 의해 처음엔 생소하고 어색하지만 그것을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고 불렀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사 때문에 그것이 모더니즘의 단절
인가, 지속인가, 아니면 절충인가 하는 논쟁의 여지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에 대한 의
견의 일례로 레이스 휘슬러,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스, 리처드 로티 등은 모더니즘
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하나의 단계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고, 반면 영국의 마르크스 자인
페리 앤더스은 '포던'과 '포스트 모던'이 궁극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같은 용어라고 파악한
다. 그러나 이합 핫산, 말콤 브래드버리, M. H. 에이브럼즈, 안드레아스 후이센과 같은 학자
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지속인 동시에 단절의 현상으로 파악하는 다분히 절충
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 간단히 각각 단절, 지속, 절충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선 마르크스주의 문학가인 제임슨을 살펴보자. 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저서 '후
기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3단계로 나눈 것을 응용하여 20세기 전반부를 모
더니즘 시대와 연결시키고 후반부를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와 연관시킨 그는 "포스트 모더니
즘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대체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어떤 근본적인 시작이나 단절
이 있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이 "단절은 백년동안 지속되어 오던 근대 운동의
쇠퇴나 소멸"에서 연유된다고 주장한다. 즉 제임슨에 의하면 다국적 기업을 근간으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영역 자체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의 두 현상은 의미와 사회적 기능에서 완전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
럼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의 시대구분을 따라 18세기 말의 최초의 산업 혁명 이후의 자본주
의적 생산 양식에 의하여 생성된 기술상의 3가지 혁명을 구분하고 있다. 1848년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생산과 더불어 시작되는 시장 자본주의의 시기를 리얼리즘과 연결시키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1890년대의 전기 및 연소 기관의 기계 생산부터 시작되는 독점 단계 또는
제국주의 단계를 모더니즘과 연계시키고 있다. 1940년 이래의 제 3단계는 더욱 '순수'해진
자본주의의 단계O인 후기-다국적-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TV, 비디오, 컴퓨터 등 전자 및
핵동력 장치들의 기계 생산과 관련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규정짓고 있다. 즉 포스트 모
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어떤 근본적인 변이 위에서 생겨난는 필연적인 문화 발
전의 단계라는 것이다.
다음은 지속이라고 주장하는 제랄드 그라프의 견해를 살펴보자. 낭만주의 시대부터 시작
되는 서구의 현대문학/예술의 발전 양상의 개념을 예술사적으로 접근하여 서술하고 있는 그
라프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가정에서 급전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이전의 움직임들의 논리적인 절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50년대와 60
년애의 네오 아방가디즘적인 항거는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혁명으로 보
기보다는, 일찍부터 허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색채를 띠었던 모더니즘 경향의 지속으
로 파악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충동이 일상 생활에 만연됨으로써 일어난 것으
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절충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합 핫산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지난 100년
간의 예술상의 3가지 변화 양상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첫째, 20세기 초반부를 동요시켰던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예술지상주의, 구성주의 등의 전위파 시기와 둘째로
모더니즘시기, 그리고 모더니즘과는 대조적으로 장난스럽고 병렬적 관계이며, 해체 주의자들
과 같은 인상을 주고 차분하며 대중사회와 전자 사회에 더 친근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구
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구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의 유명한 논문인
"postmodenism : A paracritical Biblography"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계를 도
시주의, 기술주의, 비인간화, 원시주의, 에로티시즘, 도덕률, 실험주의 등 7개의 커다란 범주
로 나누어 이들 가운데 서로 같거나 다른 점을 분별해 내었다. 다시 말해 핫산은 모더니즘
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존재를 위해 필연적인 선사를 제공하며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하여금 모더니즘 자체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그 단절성에 대한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포스
트'의 대한 논쟁은 지면상 이만하고 어쨌든 분명히 문화 전 분야-건축, 언어학, 문학, 음악,
무용, 미술, 철학, 과학, 기술, 정치, 경제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현상이 조금씩이나
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미국적 현상인가 범세계적 현상인가
그럼 포스트 모더니즘을 서구 특히, 미국에서의 현상으로만 생각해야 할까? 프랑스의 사회
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미국(1988)'에서 미국은 기원의 문제를 회피한다. 미국은
어떤 신화나 근거를 장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없고 기초적인 진리도 지니고 잇지 않
다. <......>미국은 정체성의 문제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앞으로 미래의 권력은 그런 상황을 충
분히 이용할 줄 아는 기원과 정통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속하게 될 것이
다."라고 하며 미국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의미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바 있다. 비록 포스트 모더니즘은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태리, 일본 등지에서 제각기 자구그이 문
화 상황과 관련 지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된지 오래 되었고 많은 논지들이 나오고 있으며 많
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미나나 학회가 도처에서 자주 열리고 있다. 게다가 프레드릭 제임슨
은 우리 나라 출신의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과 타이완의 현대 작가 왕웬싱을 매우 중요한 포
스트 모더니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 모던이라 일컫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목소
리와 원리들이 포용되고 통합되는 시대의 문화 현상-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이 현상을 약
간 막연하지만 거대한 특성인 불확정성 Indeterminacy로 보고 있다-을 생각해 볼 때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국제적(범서구적)현상으로 파악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서구의 지적, 정신적인 역사는 최근까지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를 토대로 하는 18세기의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성, 지식, 진보, 자율성, 자유, 과학과 철학
등의 개념들이 특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20세기의 진부한 이론을 다시 들추어보자. 다윈은 진화설을 내세워 신과 우주와 인간 관
계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종교적, 정신적 가치 체계를 흔들어 놓았고 니체는 19세기 말엽에
계보학을 내세운 최초의 해체 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상부 구조라는 모든 문명의 건축물
밑에 깔린 물질의 토대를 둔 하부구조를 들추어내었고 역사의 발전도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
거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프로이드는 자아와 주체에 대한 안이한 신념을 송두리째 와해시
킨 무의식의 개념을 체계화하였다. 최근에는 과학계에서도 닐스 보어의 상보의 원리, 아인쉬
타인의 상대성 원리, 최근의 양자 역학 등 서구 과학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런 이성과 과학과 진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신념은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핵전쟁의
위협, 무절제한 생태계 파괴, 공해 문제, 마약의 위협 등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니체, 프로이드 아래로 서구인의 자아와 주체에 대한 데카르트적 철학
과 윤리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서구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소
외되었던 여성과 제3세계인들에 의해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의 이성, 논리, 자아가 지배와
종속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음이 폭로되고 있다.
이성과 진보가 지닌 해방적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이제 문명 비판의 목표가 되었다. 이러
한 철학의 해체 또는 재구성을 하는데 있어서 급진적인 지적 접근은 청년운동, 에너지 위기,
경제 불황, 자연보호 운동, 여권 운동, 반핵·반전운동 등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서구의 문화
위기 또는 변모-즐, 모더니티의 위기 또는 모더니즘의 종말-는 후기 산업 사회와 후기 자본
주의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국지적이거나 지방적이라기 보다는 적어도 범
서구적인 현상이라고 보는데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질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 일컫는 현시대의 background를 부족하나마 살펴보았
다. 그럼 좀 늦은감 속에 확실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만약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
즘과 변별적으로 구분된다고 한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은 탈중심화(脫中心化) 현상에 의
해 특징지어질 것이다. 사실상 이 현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라고 할 수 있다. 정전(正典)이라는 말은 원래 기독교적인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나 교회의
법규 혹은 외전(外典)과 대조되는 전통 정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점차로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채 보다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처럼
탈정전화는 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작가의 죽음, 좁게는 학교 교육의 교과 과정의 수
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현상이다. 이처럼 전통이나 인습에 대한 도전
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분열적, 개방적, 부재, 분산화, 병렬적, 불확
정, 성령, 다형성 등-들은 이 특징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서양에서 지금까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로고
스 중심주의 logocentricism에 대한 반발(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나는 점을 실
마리로 하여 얽혀 있는 실을 풀어 나가 보기로 하자. 서양의 중심인 철학 및 사회 체계로서
로고스 중심 주의를 드는 이유는 로고스가 서양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그 이유가 있다. '로고
스logos'라는 단어가 가지는 두 가지 근본적인 의미부터 살펴보자.
'로고스'가 가지는 첫 번째 의미는 '말씀'으로서의 '로고스'이다. 이는 곧 기독교의 근본 사
상이며,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태어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에수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며 신약은 정전으로서 매우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이처럼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가 갖는 절대성을 보장
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말씀을 믿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 나라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하여 이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불타는 장작더미 속에서 불
태워지기도 했다.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이처럼 말소리가 갖는 우위성과 독선을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이름으로 요지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로고스'가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이성reason으로서의 로고스의 힘이다. 이성의 로고스는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를 많은 경우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처음과 끝
이 있다든지, 또는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지음을 받은 것이며, 지음을 받기 위해서는
창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위에서 본 로고스 중심주의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하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의 말씀을 믿고, 이를 따라야 한다. 이를 따를 경우,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행
동을 해야 한다. 말씀을 믿지 않거나 말씀을 따르기 위한 합목적적(이성적인)인 행동을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모두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우선권이 배제된 것들인-'비非말씀'과 '비非목적
성'에 우위를 주는 것이므로 이는 로고스 중심 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한편 로고스 중심
주의는 가부장적인 남성 우위의 사고라는 점에서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phallogocentrism라
고도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신학 체계에서는 신의 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남성이며,
그의 유일한 아들은 예수이다.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은 모두 남성이며, 예수를 배반
한 유다 까지도 남성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바로 로고스 중심 주의에서 우선권이 주어
진 말씀-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복음'gospel과 '소리중심적'photogenetic인 말을 모두 포
함하는 의미로서의 말씀-합목적성등 로고스의 특징적인 면과, 이에서 유추되는 남성, 작가,
아버지 등의 우위를 부정함으로써 수평적(병렬적)인 관계로의 변이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
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로고스 중심 주의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던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자 하는 데에 이의 특징이 잇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남
성/여성, 작가/독자, 이성/감정, 위/아래 등의 우위의 위계를 깨뜨리는 것을 바로 이러한 포
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이기도 하다.
구조주의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적 경향 즉, 포스트 모더니즘의 복합성과 다원적 구조 속에서 문학
계는 모더니즘 시대에 비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가 어떤 차이점을 나타내는지
'언어는 중심이 없다'-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진 이상, 이제는 어떤
지시어의 의미의 중심은 아무 데에도 없게 된 셈이다. -는 탈 구조주의, 특히 프랑스 학자
인,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이분법의 탈피라는 관점에서 살펴
보겠다.
탈 구조주의 poststructuraism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조주의와 탈 구조주의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960년대에 프랑스를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은, 우선은 그것이 '언
어'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구조주의의 언
어학적 배경은 언어의 사회적 체계를 의미하는 랑그 Langue와 개인적 발화를 의미하는 후
자가 아닌 언어의 사회적 체계를 의미하는 전자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스위스 언어학
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관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곧 언어 자체만
이 아니고 다른 모든 문화, 사회 체계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처에 숨어 잇는 어떤 공통된 체계나 법칙, 또는 틀을 찾으
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그 특성 자체가 처음부터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우선, 개개의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
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키려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구문'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
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엄격함을 주장하는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
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구조주
의는 또한 어떤 규칙이나 틀을 찾아내려는 과학적 태도를 갖고 있음으로 해서 늘 인간을 규격
화하고 조직화하며 패턴화하려는 위협적인 존재로서 등장하게 된다.
셋째, 구조주의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체계를 분리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를 무시
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려는 비인본주의적·비실존주의적 태조를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모든 것의 근원이나 중심이 되며 '개체'에 대한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랑그/파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지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의 근원이나 중심이 되며 '개체'에 대한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비록 지시 기호와 지시 대상의 사이가 필연적이 아니고 임의적인 것이라
인정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재현 가능성을 믿었던 낙관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것의 근원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언어 체계는
곧 기호 체계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 기호학적 특성을 띠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호의 재
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탈 구조주의-해체이론을 중심으로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미 강력하게 부상
하기 시작한 탈 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하는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평하면서
등장했다.
1966년 10월 18일에서 22일 까지 열린 미국의 존슨 홉킨슨 대학에서 열린 '비평의 언어와
인문학'이라는 주제의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당시 유럽의 지성계를 대표하던 구조주의학자들
이 대거 참여하여 발표와 토론을 가졌다. 그 심구 문단과 학계를 풍미하던 구조주의와 구조
주의의 연로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날카롭게 비판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젊은 학자가 바로 후에 해체 이론을 창시한 자끄 데리다였으며 그 논문
이 바로 유명한 '인문학의 어술행위에 있어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es of Human Sciences였다. 프랑스로 돌아간 바로 'De la
grammatologie, La voix la phenomene-를 출판하여 해체 이론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탈구조주의에 속하는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우선 서구의 형이상학이 기본적으로 '말'중심
주의logocentrism -글 writting보다 말speech을 더 중요시하는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전
제하에서 시작된다. 즉,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우리가 '말'할 때는 화자와 청취자가
현존 presence해 있으며 화자의 현재 생각을 바로 그 자리에서 전달해 주는데 반해, '글'은
화자와 청취자의 부재absence속에서 이루어지며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원
래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의사
소통 방법인데 반해, '글'은 인위적이고 간접적인 말의 재현representation에 불과하다는 편
견이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셈이 된다. '글'에 대한 서구 사상의 이러한 편견은 우선 두 가
지 문제를 제시한다. 첫째, 서구의 '말' 중심 주의는 '글'에서와는 달리 '말'에 있어서는 의도
와 의미 사이 또는 지시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둘째,
음성이라는 기호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 presence를 믿는다는 것이
다. 데리다는 우선 '글'뿐만 아니라 '말'의 의도와 의미 사이에도 거리와 차이, 단절이 있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절대', '진실', '근원', 혹은 '중심'의 부재를 주장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
의 낙관주의를 뿌리에서부터 해체한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말'보다 '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말'과 '글'은 특권/억압의 관계가 아니
라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영향적이며 본질적 및 숙명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말'은 '글'을 전제로, 또 '글'은 '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영역을 '차이'
만으로 간단히 규정지을 수 없으며, '차이'와 '유보'의 이중 개념에 입각해서 바라보아야 한
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반기를 들고
잇는 셈이다. 데리다는 또, 서구 사상이 지시 기호/지시 대상, 심층구조/표면구조, 말/글, 근
원/파생, 중심/주변 등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며, 사실 상반되는 것
처럼 보이는 이 두가지 요소들이 상반되면서도 동시에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
문에 이와 같은 이분법적 태도는 오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류는 공통된 언어라는 매개
체를 쓰는 이유로 해서 부지불식간에 의해 작품 속에 주입되기 때문에 성실한 독서를 통해
그와 같은 오류-'현존'에 대한 착각과 이분법적 사고방식-를 찾아내고 그것이 사실은 불안
정하고 전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해체 이론의 기본 작전이 되는 것이
다.
자끄 데리다에 의해 시작된 해체 이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우선,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이래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의 당위성에대한 강력한 의
문과 도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서구인의 심층의식이나 서구 사상의 근저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그 중 하나에 우선권 또는 특권을 주는 '이분법적 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말/글, 이성/광기, 문명/야만, 내부/외부, 남/여, 자신/타자, 선/악, 백/흑, 빛/어둠 등
이 그 대표적 예인데, 서구인들은 둘 중 첫 번째 것에다가만 우선권을 주고 둘째 것은 이차
적인 것 또는 오염된 형태로 '제외'시켜 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같은 짝짓기를 '폭력
적인 서열 제도'라고 부르며, 첫 번째 것으로부터 특권을 박탈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데
리다가 시도하는 이 '서열의 전도는 단순히 두 번째 것에 특권을 부여하여 첫 번째의 위치
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폭력적인 서열 제도
'를 만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전략은 보다 복합적이고 미묘해서 , 두 번재 것이
첫 번째의 위치로 올라오는 순간 이번에는 그 새로운 것으로부터도 특권을 박탈한다. 그러
므로 데리다의 이론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자리바꿈'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데리다의 해체 이
론은 바로 이 부단한 '자리바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말을 바꾸면, 데리다는 이 모든 이
항 대립적 요소들이 서로 배타적이고 상충적이라기보다는, 사실 서로 대체될 수 있고 또 서
로 보충될 수 있는 '상호보완적'존재라는 인식을 토대로, 이 두 요소 사이의 서열과 경쟁을
무너트리고 자유로운 '치환'을 허용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해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
이다. 물론 그것은 두 요소 중 어느 쪽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
다. 어쨌든, 해체주의의 기본 태도는 기존의 억압적인 전통, 교권주의, '근원', '중심'등에 대
한 도전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이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에 가장 강력한 선구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니체일 것이다. 니체
는 '개념'의 형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찍이 절대적인 '근원'에 대한 불신과 끝없이 서로 다
른 개념의 '차이'를 주장하였다. "올바르고 믿을 만 하며 곧 충실한 오리지날 형태"란 없기
때문에 '진실'과 '근원'이란 사실 착각에 불구하며, 따라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파
괴될 수 있는 진실'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의 이와 같은 사상은 곧 독선적인 서구의 형
이상학 또는 그가 'morality'이라 부르는 관습적 사고 방식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어 진다.
관습적인 '모럴러티'에 대항하여 선악을 초월한 'extra morality' 속에 살며, 우상과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가 탄생할 새벽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에게 디오니소스적인 희열을 가
져다준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해체 이론에 대해 '미국에서의 해체 이론'이라는 글을
쓴 로버트 앨터는 해체 이론이 미국에 끼친 좋은 영향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첫째
는 해체 이론이 미국인들에게 철학적 사고 능력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고, 둘
째는 해체 이론이 문학작품의 의미는 통일되어 있고 단일하다는 기존의 전체에 대해 '건강
한 회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앨터의 첫 번째 의견에는 약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두 번째 지적은, 해체 주의가 미국에서 환영받고 있는 가장 근
본적인 이유로 그 이론이 바로 '권위에 대한 도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맥락에
서 볼 때, 설득력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모비 딕'
해체이론이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서구의 형이상학 및
사고 체계의 독선과 횡포에 대한 의문과 반성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라면 문학작품 속에 나타
나는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공부했던 멜빌의 '백경'Moby Dick(1851)의 화자 이즈마엘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
다. 이 작품은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고지식한 청년 이즈마엘이 거대한 흰 고래인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항해를 통하여 다양성과 모호성을 포용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소
설이다.
우선 이즈마엘은 피쿼드 호를 타기 전에 뉴 베르포드의 한 여관에서 남태평양에서 온 야
만인 퀘이쿼그와 같은 방안에서 지내게 된다. 기독교도인 이즈마엘은 처음엔 폴리네시아인
이교도의 생활 습관과 우상 숭배가 싫었으나 아래 이즈마엘의 독백에서처럼 점점 그것이 자
신의 근거 없는 편견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이해하게 된다.
<"이 자리의 형편에 있는 자네는 정말 문명인답게 행동하였네." 실제로 이런 야만인에게
남들이 뭐라 하든 내면에 아름다운 친밀감을 갖고 있고 그들의 본질적으로 올바른 예의는
놀라운 것이다......그가 어디까지나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량한 우리의 장로교들은 그런 점에서 깊은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이교도 이
건 무엇이든 간에 다른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미치광이 같은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서 자기들만이 우수하다고 생각해선 안될 것이다.">
<"......자, 퀘이쿼그는 내 이웃이다. 그럼 나는 퀘이쿼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와 같이
기독교 예배 의식에 동참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의 예배 의식에 동참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만 하리라.">
바로 이 순간 이즈마엘은 백인/유색인, 기독교/이교, 문명/야만 등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
에서 벗어나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에이허브 선장의 중요성은 먼저 낭만적인 청년인 이즈마엘에게 현실의 냉혹함과
위험성을 부단히 상기시켜 주는데 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
던 낭만적인 나르시스적 경향을 가진 이즈마엘은 에이허브를 통해 비로소 그 평온하고 아름
다운 물의 표면 속에는 사악하고 치명적인 현실(모비 딕)이 헤엄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이즈마엘은 아름다운 바다를 내려다보며 목가적인 환상에 젖어 있을 때
에이허브가 모비 딕을 처음 발견하는 선원에게 줄 스페인 금화를 돛대에 박는 금속성 소리
가 요란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에이허브의 두 번째 중요성은, 그가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내어 그 베일을 벗기는 것의 불가능함을 이즈마엘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데 있
다. 에이허브는 그 절대적인 존재를 추적해서 대면하고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결국엔 자신이 던진 밧줄에 의해 그 불가사의한 존재에 묶인 채로 죽고 만다. 그러
므로 에이허브를 통해 이즈마엘은 낭만주의/사실주의, 꿈/현실, 광기/정상, 확실/불확실 등의
상호 보존적 속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대중화의 발화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삶과 그 범위, 내구력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심각한 변화가 계속
되어 왔으나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그 변화의 전모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업
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대중 사회'(비록 그 의미는 매우 다원적이지만)의 발흥
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이 용어를 '중심'에서의 탈피, '억압된 것의 복귀'와 연관지
어 생각해 보겠다.
그럼 대중 사회 속에서 1960년대 이후 소설의 대중화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자. 1960년대
는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드는 문화적·사회적 및 정치적 격변기였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60년대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사회 각층에서 급속도로 일어났던 시기였
다. 우선 아폴로호 우주선의 달 착륙이 있었고 텔레비전의 급속도 보급, 장거리 및 국제 자
동 전화의 등장 및 제트 여객기의 등장으로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었으며, 여성 해방 운
동과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 그리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의 등장으로 시민 의식이 고취
되었고, 일련의 정치적 암살, 반전 데모 및 월남전의 참상 등으로 인해 현실 의식이 고조된
때가 바로1960년대였다. 이 거대한 대중 문화 시대에 피들러 같은 비평가는 더 이상 엘리트
주의 모더니즘 소설은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토마스만의 '마의산'
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난해한 소설을 읽지 않으며 평소 대중 문화
의 옹호자였던 피들러로 하여금 그가 소위 '예술 소설'이라고 부르는 모더니즘 소설의 죽음
을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피들러가 선언 및 예언했던 '소설의 죽음'은 결코 소설의
자체의 죽음이 아니라 소위 난해한 아방가르드 소설 그리고 귀족적이고 독선적인 모더니즘
소설의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대중 사회라는 표현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더욱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세분화되어지는,
반은 복지 사회적이고 반은 전체주의적인 비교적 안락한 사회를 의미하게 된다. 그 사회 안
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충성심이나 연대감, 그리고 협력과 같은 개념들이 해이해지거나 그
렇지 않으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고 또한 명확한 이해 관계나 의견에 기반을 둔 일관성
있는 대중이 점차 분파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소비
자로 전락하여 자신이 탐닉하는 생산품이나 오락, 그리고 가치처럼 하나의 대량 생산품의
신세가 되고 만다. 즉, 가정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의 중심지들이 인간에 대한 구속력을 상실
해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적으로 향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회 집단 혹
은 종교 집단에게 합법적으로 그 권리를 양도할 수도 없는, 자유라는 짐을 진 채, 떠돌게 된
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계급적 질서의 붕괴, 탈 중심화로
인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의해 다원화된 대중사
회의 도래와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들-예술가를 사회로부터 격리 내지 소외시키는 사회성
및 현실성 결여,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성, 엘리트주의, 귀족주의, 전통과 과거의 절대적 가치
에 대한 낭만적 향수-을 불신하고 소설의 사회성 및 현실성, 평이성, 대중주의의 추구, 그리
고 전통과 과거와 절대적 가치에 대한 불신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소설의 출현은 당연한 것
이다. 특히 그 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되거나 도외시되어 왔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
를 부여받으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더니즘의 엘리트적이고
전통적인 소설의 쇠퇴와 대중성으로 인한 '주변'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즉, '억압된 것의 복귀'
현상은 우선 무엇보다도 억압되었던 소수 민족의 부상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60년대 초엽부터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과 '블랙파워' 같은 정치 운동으로 말미암아 흑인
의 위치가 상당히 격상되었다.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그 동안 말하자면 서자취급을 받아
온 상태에서 적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흑인 미학'이란 말이 만들어질 만큼 흑인 문학가들의 활약들도 부쩍 많아 진 것 또한 사실
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흑인의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소수 민족의 경우에도 마
찬가지로 해당된다. 예를 들어 인디언 원주민들을 비롯하여 아일랜드 계통의 민족, 동구라파
의 민족, 멕시코 계통의 민족,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과 한국 같은 동양 민족의 고유의 정체
성도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한 청년 문화의 대두 역시
소수 민족의 대두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청년 문화는 일종의 하부 문화로서
그 동안 지배적인 문화로 군림해 온 전통적인 기성 문화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변적인 것의 복귀 현상'이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성
性의 해방'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의 해방 현상이 가장 명시적으로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
로 일어난 영역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페미니즘 운동이나 페미니즘 문
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특징적으로 남성 중심 주의에 기초한
문학 전통이나 이론이었다. 더욱이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의 경우 흔히 여성들은 주
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 이론적 뒷받침을 해준 이론가는 케이트 밀레트이고 그녀는 그녀의
저서 '성의 정치(1970)'에서 그 동안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부장 제도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그 동안 잊혀진 여성
작가들을 새로이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고
전이라고 간주해 온 작품들 속에 얼마나 여성들이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 다음에서 우리는 몇몇 학우들의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을 TV광고와 소설을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살펴보고 비판해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갓 태어나 걸음마 하는 단계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맹목적인 비난
은 피했으면 한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해결하고 판단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출세한 자와 그렇지 못한자, 알게 모르게 행해지
는 권력자의 횡포와 억압당하는 피권력자, 무역 전쟁이라는 슬로건 아래 강대국의 후진국에
대한 무역 제재 등, 특히 현대의 극단적인 종교적 태도-'시한부 종말론'(선택된 자들만이 새
로운 '시작'을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멸망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
라는 포교활동-는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직 공중에 떠 있어 그것이 떨어질지 아니면 더 나아갈지는
아직 모르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다시
한번 인류 문명의 '종말'과 '시작'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중
요한 20세기의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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