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권신아
[애송시 100편-제37편]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1974년>
[감상]
중학생 때 길에서 주운 한하운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시인.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시인. 출가와 환속, 숱한 기행, 폐결핵, 자살시도,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시인. 시, 소설, 평론, 평전, 번역, 수필 등 150여 권에 이르는 신화적 글쓰기로 유명한 시인. '젊은 시인이여 술을 마셔라'라고 일갈하는 말술의 시인. 격정적인 시낭송이 일품인 시인. 낭만적인 허무의식에서, 역사와 민중에 대한 첨예한 현실인식으로, 그리고 선적(禪的) 초월의식으로 시적 변모를 거듭해온 시인. 올해로 등단 반세기를 맞이하는 시인. 여러 의미로 고은(75) 시인은 '큰' 시인임에 분명하다.
이 시는 신동문 시인의 모친상을 조문하러 문의에 갔다가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문(文)'과 '의(義)'의 마을, 문사(文士) 혹은 지사(志士)들이 꿈꾸었을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명이다(실제의 문의마을은 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으며 그 일부가 문의문화재단지에 복원되었다). 문의마을에 눈은 만났다가 갈라지기를 거듭하는 삶과 죽음, 산과 들, 마을과 길의 경계를 덮으며 내린다. 경계를 덮으며 내리는 눈은 온 세상을 낮게 그리고 가깝게 만들고, 적막하게 그리고 서로를 껴안아주고 받아줄 듯 내린다. 시인에게 그 눈은 죽음처럼 내리는 것이다. 우리 삶 속의 죽음처럼.
그의 다른 시 "싸락눈이 내려서/ 돌아다보면 여기저기 저승"('작은 노래'),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눈길')라는 시에서도 눈은 '대지(大地)의 고백(告白)'이나 '위대한 적막(寂寞)'처럼 내린다. 한 평자는 그러한 눈을 '아름다운 허무'라고도 했다. 그러나 눈은 금세 내리고 금세 녹아버리듯, 우리가 삶에서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란 높고 먼 일이다. 상여(喪輿)의 길처럼, 마을에서 산에 이르는 길은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 문의에 가서 시인이 본 것은 그 길이 '가까스로 만난'다는 것이고,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으며, 가깝게 낮게 내리는 눈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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