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

도스또예프스키 / 백치

자크라캉 2006. 7. 10. 11:23
도스또예프스키/ 『백치』

아름다운 한 영혼의 절규

류수안


어둠이 혼신의 힘으로 이 한사람만을 밀어낸 듯 사진 속의 도스또예프스키는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앉아 있다. 두 손을 깍지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얇다란 눈꺼풀로 반쯤 눈을 가린 채 책갈피 안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다. 정지하여 있는 그의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아 본다. 그런데, 놀랍다. 손을 올려놓은 그의 심장에서 내 심장에 손을 대었을 때 들었던 박동 소리가 들려오더니 눈꺼풀조차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태어나려는 한 인간의 얼굴을 지상으로 밀어내려 돌이 저 오랜 침묵을 깨듯 사진 찍히는 순간 오직 그가 되고자 몰려들었던 빛은, 색채들은, 그 뒷바탕인 어둠속에서 여전히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한 그의 사진을 보며 나는 그가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기간 동안을 숫자로 계산해 본다. 반복하여 몇 자리의 수를 더하고 빼다가 그만 연필을 내려놓는다. 나는 도스또예프스키라는 이 위대한 인간의 수명을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있는 숫자를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두번째의 결혼 이후 암울한 현실과 빈곤에서 도망치듯 찾아간 유럽에서 『백치』는 씌어졌다. 발표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심오하고 비통스러운 비극을 얘기하고 있으면서도 그럼으로 하여 또한 가장 건강하다는 이 소설을 쓰기 전 그는 편지로 조국의 친지들에게 알렸다.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이 장편의 구도는 무조건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걸 시도한다면 그건 분명히 내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실패할까봐 나는 두렵다.’ 이렇게하여 존재하지 않는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유럽에서 씌어진 이 소설은 1868년 러시아 통보지에 일년 여에 걸쳐 연재되기 시작하였다.
어찌보면 도스또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단순한 구조의 연애 소설이랄 수도 있는 이 소설엔 작자의 소설 구성상의 중요한 요소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법정의 기록은 예술이 손을 대기를 회피하거나 표면적으로밖에는 손을 대지 않는 인간 영혼의 암흑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평소 그의 주장대로 이 소설에도 살인이 등장하여 구성상의 중심을 이루어 나가는 구실을 한다. 연속되는 여러 개의 장면으로 이어진 줄거리는 등장 인물들에 의하여 빠르게 혹은 느리게 진행되어 간다. 세익스피어의 극이 그러하듯 이들 등장인물들은 어디서인가 홀연 등장하여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주위에 쏟아붓고는 심연으로 사라진다.
오로지 말하고 있는 인간만이 있을 뿐인 이러한 이 소설의 전편을 압도하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환상이라고 보았던 것에서 현실의 참된 본질을 본다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작자의 심리 분석이다. 한 인간의 내부로부터 폭발하여 자연조차 그 힘에 압도당하여 사라지게 하는 인간 심리의 무서운 흐름이다.
사형 집행대에 묶여 있는 동안 죽음의 깊고깊은 심연을 보았던 작자가 본 가장 아름다운 인간은 예수였다. 유형지에서 책을 통해 만난 이 무한히 아름다운 인물의 출현은 그에게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이 한 천재에 의해 씌어진,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서럽다는 책속에 등장하는 돈키호테였다. 유형지에서 고향으로, 유럽으로 한시도 가슴에서 놓지 않고 품고 다녔던 이 아름다운 영혼의 인상을 작자는 『백치』의 주인공 므위시킨 공작을 통하여 구현한다. 쫓기듯 찾아간 유럽에서 본 한스 홀바인의 그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았던 때의 충격을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하여 말한다.
어느 날 이 아름다운 인간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이면서 어린애처럼 순수한 간질병 환자 므위시킨은 심연 속의 인간들에게로 온다. 순수한 영혼에게서 발산되는 그의 빛은 곧 이들 심연 속의 인간들에게 골고루 뿌려지기 시작한다. 심연 속의 인간들에게 므위시킨은 그 자신의 내면의 인간을 거쳐 이해한 신을 말한다. 무섭고 신비로운 미(美)가 싸우고 있는 장소인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인류에 대한 예수의 사랑인 연민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심연 속의 인간들은 그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그의 빛을 느끼고 자신들의 정신적 스승이며 고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므위시킨은 간곡히 말한다. 텅 빈 방을 향하여 안에 문 열어줄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여 문을 두드리며 절규한다. 나와 얘기 좀 하자.
해야 할 말로 가슴이 두 토막으로 나뉘어질 듯한 고통속에서 여기 이 장소에 자신이 전혀 낯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삶의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 끝내 이 아름다운 남자의 절규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 심연 속의 사람들은 제가끔 소리친다. 나와 얘기 좀 하자.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주인공이 예빤친 장군의 아내와 세 딸들에게 들려준 잡상인 노파의 딸 마리이에 관한 부분이다. 주인공 므위시킨이 간질병을 치료하였던 스위스에서 만난 마리이는 눈빛이 잔잔한 스무살 가량의 처녀로서 중증의 폐병에 걸려 있기도 하다. 병든 몸으로 어머니를 도와 품을 팔러 다녔던 이 처녀는 어느 날 프랑스 행상인에게 유혹당하여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되기 전에 버림을 받아 거지의 행색으로 되돌아온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마리이에게 잔인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인 노파조차 딸에 대한 증오를 품은 채 죽어 버린다. 저항할 생각은 품어 보지도 못한 채 자신을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마리이는 맨발로 근처 목장의 소를 돌보기 시작한다. 아이들조차 마리이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맨발의 마리이의 영혼 속의 숨은 가치를 알아본 므이쉬킨은 아이들을 설득한다. 마리이와 아이들에게 들려주려 동화를 공부한다. 생의 마지막 날들을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해 했던 마리이는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꺾어온 야생화에 뒤덮여 숨을 거둔다.
한 장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이 이야기를 작자는 하필이면 왜 이 소설의 도입부에 놓았을까. 어쩌면 이 이야기는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예수의 전후 상황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심연의 인간들 속으로 내던져진 므위시킨의 앞으로의 운명을 압축하여 보여준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린 아이의 영혼만이 신이 사랑한 인간의 영혼이라는 작자의 생각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러할까. 일찍이 소설은 작자의 피로 쓰는 것이고 그러므로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져왔다. 그렇다면 인간 심리의 깊은 곳까지 꿰뚫고 들어가 그곳에 있는 또다른 인간 내부의 우주를 보는 듯한 『백치』에서 받은 나의 이 느낌 또한 소설을 쓴 작자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 역시 나의 피, 나의 시각으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이해한, 어쩌면 더욱 중요한 많은 것을 놓쳐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제1부
11월 하순 간질병 치료차 스위스에 가 있던 므위시킨 공작은 사년만에 무일푼으로 뻬제르부르그로 돌아오는 기차에 오른다. 낡은 옷 보따리 하나만을 든 채 끼어든 삼등 열차에서 공작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으러 오는 로고진과 하급관리 레베제프와의 대화에 끼어들어 떠나 있던 고국의 소식을 듣는다. 소지주의 딸로서 화재로 부모를 잃은 후 지금은 양육하여 준 토츠키라는 대 지주의 정부가 되어 있다는 나스따샤의 이름을 듣는다. 목적지인 예빤친 장군의 집에 도착, 가문의 마지막 남은 인척이라는 장군의 부인을 기다려 하인방에 앉아 있던 공작은, 한 인간의 영혼에 모독을 줄 뿐인 러시아의 사형제도에 대해 하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부터 공작의 순결한 영혼의 빛은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비치기 시작한다. 불려들어간 장군의 방에서 므위시킨은 장군의 문서 작성을 돕고 있는 야심가로 장군의 막내딸 아글라야와 결혼하려 계획적으로 나스따샤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가아냐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나스따샤의 사진을 본다. 순간 공작은 인간 심연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나스따샤의 눈빛에서 칼로 심장을 찔리우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마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여자의 얼굴을 보며 므위시킨은 문득 열차에서 만난 로고진을 떠올려 어쩌면 그가 나스따샤를 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몸을 떤다. 이어 어린애같은 장군의 부인과 세 딸들에 둘러싸여 저녁 식사를 하던 공작은 무엇이나 이야기해 달라는 이들의 간청에 스위스에서 만난 마리이의 얘기를 들려준다. 임시로 묵게 된 가아냐의 집에서 나스따샤와 첫대면한 공작은 나스따샤의 생일 연회에 초대된다. 이 자리에서 나스따샤는 죄의 고백 놀이를 할 것을 제의한다. 이때 나스따샤에게 목숨을 걸고 있는 로고진이 돈뭉치를 들고와 나스따샤에게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므위시킨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참된 인간을 본 나스따샤는, 그러나 로고진을 따라 공작을 떠난다.

제2부
죽은 친척의 유산으로 백만장자가 된 므위시킨은 러시아로부터 파리에 와 있던 자신에게서 다시 로고진에게로 가버린 나스따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러시아로 돌아와 레베제프의 집에 묵게 된 므위시킨 앞에 로고진이 나타나 나스따샤를 데려가라고 말한다. 공작의 나스따샤에 대한 사랑이 연민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그것이 이성간의 사랑보다 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로고진은 질투로 인해 돌아가는 공작의 등 뒤에서 칼을 빼든다. 오래 전부터 그러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던 공작은 로고진의 칼을 느낀 순간 긴장으로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다. 공작의 병 문안을 목적으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폐병 말기로 죽음을 눈앞에 둔 이뽈리뜨는 말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에게는 연령이 없다. 미인조차 망자가 되어 버린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지배하고 있는 엄격한 자연률이 현재 나의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의 행위는 인간을 조소하기 위한 것이다.’

제3부
산책나간 공원에서 아글라야는 세그루의 나무 아래에 있는 초록색의 의자를 가리키며 자신이 내일 아침 일곱시에 그곳에 나올 것임을 암시한다. 만난 첫 순간부터 이성으로서 아글라를 사랑하고 있던 공작은 그 암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돌아온 공작은 몇몇 사람들에 둘러싸여 읽고 있는 이뽈리뜨의 일기 내용을 듣는다.
‘세계를 구하는 것은 美이다. 예수의 그림엔 어떤 경우이건 그 안면에 비범한 美의 음영이 첨가되어 있다. 홀바인이 그린 예수를 보았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아직도 체온을 갖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받았던 육체의 고통이 그대로 나타나있는 이 시체의 그림을 보면 누구도 그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제4부
아글라야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공작이 장래 사교계에 진출하여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를 실험하려 장군의 집에서 열린 야회에서 공작은 옆자리의 신사와 말을 나눈다. 무신론에 대하여 권태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가운데 그러한 말조차 중지해줄 것을 종용당하자 공작은 말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다. 사랑을 다른 여자와 나눌 수 없었던 아글라야가 떠난 후 공작과 결혼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던 나스따샤는 더 이상 공작의 희생을 볼 수 없어 로고진을 찾아가 죽임을 당한다. 캄캄한 어둠 속 신부옷 그대로 내출혈로 죽어 있는 나스따샤 곁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 이들은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로고진을 찾아간 나스따샤에 대하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에 대하여, 드문드문 말을 나눈다. 잠든 로고진이 깨어날 때마다 어버이처럼 어루만져 다시 로고진을 잠재우던 공작은 창백한 로고진의 얼굴을 자신의 눈물로 적셔가며 다시는 치유될 수 없는 백치가 되어간다. 이렇게 하여 거의 정상인으로 이들에게 왔던 므위시킨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이들 심연 속의 인간들 곁을 떠난다.

몇 자루의 붓을 들고 이상(李箱)은 서 있다. 그림을 시작하려는 기척은 없이 캔버스 너머 저편만 바라보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손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보려는 사물들의 필사적인 몸짓이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태어나려는 사물들이 내지르는 절박한 비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육신이흐느적흐느적하도록피로했을때만정신이은화처럼맑소
드디어 바라보기를 그친 이상은 그중 한 붓을 들어 듬뿍 황색의 물감을 적신다. 다음 붓은 검은 색으로 적신다. 색깔들은 격렬히 무엇인가 되어보려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내출혈이뻑뻑해온다그러나피부에상채기를얻을길이없으니악령나갈문이없다
색깔들은 차츰 한 남자의 형상을 띠어간다. 채 마르지 않은 색깔 위에 다른 색깔이 겹쳐지면서 뒤틀린 관절이 되어간다. 짓이겨져 일그러진 얼굴이 된다.

―방대한묵흔의분류는온갖합음이리니분간할길이없고다물은입안에그득찬서언이캄캄하다
뒤틀린 관절 그대로 그림 속의 남자는 좁은 액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오그린다. 이상은 색칠조차 채 끝나지 않은 이 남자를 들어 벽에 걸려고 시멘트벽에 탕탕 못을 박는다.

―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벽에 그림을 걸어놓은 이상은 붓을 내던진 채 바닥에 주저앉는다. 은화처럼 맑은 정신으로 자신과 그림 속 남자와의 거리를 바라본다.

―나의내면과외면과이런계통인모든중간들은지독히춥다
그림은 마친 이상은 또다시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본다. 내출혈 일으키듯 몸안 가득 퍼져가는 어둠속에서 그는 캄캄한 저쪽 누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소리친다.

‘이봐,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더듬어가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네그려 이렇게 캄캄해서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