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자기 대상화와 소울soul의 영혼 / 심은섭
[정계원 시인 시집 『접시 위에 여자』 시해설
세계의 자기 대상화와 소울soul의 영혼
(심은섭 | 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 교수)
Ⅰ. 프롤로그
시의 정의는 “힘찬 감정이 자유롭게 분출된 것”이라는 워즈워드의 주장과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T. S. Eliot의 주장은 대립적이다. 전자와 후자의 정의를 일반적으로 주정시와 주지시로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되어 왔다. 현대에 접어들어 시를 바라보는 시관은 고양된 시인의 정서에 의해 독자에게 감흥을 줌으로써 현대인의 윤리의식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표현론적 효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또 시를 시인의 내부에 있는 본질과 연결시켜, 구체적인 작품보다 어떤 정신이나 성질로 보는 태도가 주를 이룬다.
이처럼 시는 현대인들에게 건강한 윤리의식을 갖게 하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혜안 제시라는 당면과제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시의 본질이다. 우리들이 이 명제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시를 지나친 감정의 표출로 쓸 수도 없고, 또 개성이나 감정으로부터 도피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녹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과 사물과 관념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도 한 편의 시를 내놓기에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시의 본질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하나하나 뛰어넘으며 창작의욕을 펼쳐온 정계원 시인이 2007년 등단이후 첫 시집 『접시 위에 여자』를 상재한다. 문단에서 함께 활동하는 시인으로써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계원 시인은 등단초기보다 최근에 들어와서 왕성한 문단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중앙문단에 소재하고 있는 여러 문예지에 많은 신작발표가 그것을 방증한다. 그것도 한 잡지에 신작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잡지에 다양한 내용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시인에겐 무엇보다도 꾸준한 창작활동이 첫 번째 의무이다. 창작활동은 곧 신작발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곧 신작발표라는 등식의 성립이다.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이것은 시인의 고양된 정신세계를 요구하고, 내면의 모든 것을 언어로 빚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인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시를 써야 하는 난제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이유는 이유일 뿐이다.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면 마땅히 시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정계원 시인은 등단 한 지 10년이 되어 첫 시집을 상재함으로써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이 우리들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시의 경향은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을까. 시의 속성은 서정인가, 아니며 모더니티인가. 시어의 조탁과 언어 정제 능력은 어떠할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궁금증을 불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첫 시집 『접시 위에 여자』에 대략 60여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정된 지면 관계로 많은 양(量)의 시편들을 한 편 한편 모두 분석하여 해설을 담을 수는 없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시를 선택하고, 또 정독을 선행지표로 삼으며 분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첫 시집에 만족하지 말고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과 같이 지속인 신작활동에 임해주시길 미리 당부도 곁들인다.
Ⅱ. 의식의 문제에 대한 물음
문학의 기능은 쾌락적 기능과 교시적 기능이 있다. 전자는 관능적, 혹은 대중적 쾌락과 미적 정서를 통한 쾌락을 말한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주며, 삶의 방향을 제시 한다. 근대 이후의 카프카의 ‘선전문학’,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알베레스의 ‘구제문학’ 등도 일종의 교시적 기능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문학은 철학·역사·과학처럼 지시적이거나 관념적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즐거움과 감동 속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하는 것이 문학의 교시적 기능이다. 요약하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어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정계원 시인은 「휴면계좌의 내력」를 통해 교시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들려주고 있다.
그가 옥탑방에서 새우잠으로 열대야와 싸울 때,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바흐의 음악을 들었다 그의 구두굽이 몸을 낮출 때, 난, 황금마차를 탄 신데렐라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 금빛그림자를 끌고 방으로 들어선다 초록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는 정장 한 벌, 갈비뼈가 앙상한 휴면계좌를 바라본다
-「휴면계좌의 내력」 일부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관점 중에서 「휴면계좌의 내력」은 반영론(모방론)에 해당된다. 이것은 작품과 작품의 대상이 되는 현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으로써 문학작품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모방 내지 반영이라는 점의 강조이다. 즉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맺고 있는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예시된 「휴면계좌의 내력」은 시적화자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작품이다. ‘그’의 행동방식과 ‘나’의 행동방식이 상호 대조적인 형식과 내용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순전히 ‘그’의 옳은 행동과 ‘나’의 그릇된 행동의 대조를 나타내 보이며, 화자(persona)는 ‘내 몸속으로/압정이 날아온다 정신의 실타래가 뚝 끊어진다’는 진술로 독자가 스스로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주변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정계원 시인은 당대의 현실을 진실하게 시작품에 반영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러한 시를 감상함으로써 삶의 가치와 세계의 본질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적 태도를 갖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정계원 시인은 「휴면계좌의 내력」처럼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에 반대되는 것, 또는 주위의 다른 어떤 것을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 묘사 대상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대조법을 사용한다. 그는 단어·구·절의 의미를 대조시키는 것 중에서 ‘그가 칼국수를 먹을 때, 나는 프랑스 달팽이요리를 숭배했다’와 같이 ‘절’과 ‘절’을 대립시켜 미적 효과를 한층 극대화한다.
어둠이 들어온다 몸속으로 방을 타고 무너진다 어둠과 방 사이에 한 사내가 온다 향기, 젖은 목덜미로 내려와 앉는다 거실, 가득 꿈틀거린다 가로등 불빛이 목덜미를 싸 않는 방 그림자를 껴안은 방 그림자가 외투를 벗는다 펑퍼짐한 엉덩이가 떫다 방 속에 있지 않고 어둠 속을 다시 뒤집는다 방만 지켜보는 밤은 깎이지 않는 방이다
「그림자 방」 전문
두 번째로 예로 삼는 「그림자 방」은 넌센스 시이다. 이런 종류의 시는 언어도단의 비정상적인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몽롱한 이미지와 난해한 표현을 시적장치로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내용 파악의 혼란과 장애를 가져다준다. 그 반면 독특한 미학적 풍격(風格)은 오히려 현대시에서 높게 평가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시는 주제나 소재에 있어서 시인이 의도하는 바를 추측할 수 없게 장애를 준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은 ‘몽롱’하고 ‘애매모호한’ 시 자체의 표현방법을 다각도로 분석해 볼 필요성을 가진다.
환상이란 모든 문학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며, 상상력에 의해 결과물을 생산하는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은 ‘비현실적’이며, ‘초현실적’이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경험과 인식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미지의 경지이며 신비의 영역이기도 하다. ‘젖은 목덜미로 내려와 앉는다 거실, 가득 꿈틀거린다 가로등 불빛이 목덜미를 싸 않는 방 그림자를 껴안은 방 그림자가 외투를 벗는다 펑퍼짐한 엉덩이가 떫다 방 속에 있지 않고 어둠 속을 다시 뒤집는다’는 시적표현들은 모두 환상이며, 몽환의 세계다. 이처럼 몽환적이면서, 즉 꿈속의 환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것을 아름답고 허망한 것으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의 「그림자 방」은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요소로써 ‘時空의 초월’과 ‘신선세계의 추구’라는 환상의 세계이다.
정계원 시인이 노래한 「그림자 방」을 독자들이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들이 사물(시적대상)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또는 지나치게 고정관념으로 수용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는 사물의 표면만을 인식하는 습관을 가진 독자들의 상식세계를 희풍(戱諷)하는 작업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두통이 해무처럼 어제의 기억으로 이륙한다
사내 아이,
들국화 핀 접시 속으로 걸어가고
뇌 속으로 가을하늘이 들어찼다
모두의 입속에 흰 별이 가득 피어나는
-「그릇이 경전이다」 일부
정계원 시인의 「그릇이 경전이다」는 시인의 일상적 삶의 울음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에겐 하루 일과 중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저녁식사 시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것은 ‘밥’이라는 매개체 때문이다. 밥을 식탁 한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앉아 하루의 일들을 털어놓을 수 있으므로 시인에게, 독자들에게 ‘저녁,/밥그릇이 경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밥그릇’이 음식을 담는 한낱 용기(用器)에 불과하지만 시인의 눈엔 경전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며, 이것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시로 탄생시켰다. 즉 정계원 시인이 ‘밥그릇’을 밥그릇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이것야말로 시인의 본연의 역할인 것이다. 이렇게 ‘밥그릇’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진솔한 삶을 영위할 때 ‘백열등은 혼신을 다해 두 눈을 붉혀’ 주고 식탁은 ‘스스로 등을 내어주며, ‘은빛수저는 입속으로 흰 별을 퍼’ 날라준다.
학포리, 그 곳에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한 그루 나무가 산다
그는 첫닭울음소리에 신발 끈을 동여맨다
찬바람이 주머니 속을 비울 때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 울음과 맨주먹으로 싸운다
잔뼈의 새, 그들의 방파제다
바람이 점령한 들판으로 달려가
곡괭이 끝에 묻은 지난해의 흙을 떨어낸다
······〈중략〉······
어느 날,
그는 사냥교본을 나뭇가지에 걸어둔 채
지상에서 사라졌다
-「황금털사자느티나무」 일부
이 지구상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시간에 떠밀려 하나 둘 사라지지만 그 삶의 흔적은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역사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이 세상에 잠시 들렸던 사람은 모두 하나같이 사냥교본 하나를 남겨놓고 떠나간다. 정계원 시인의 「황금털사자느티나무」 속에서도 ‘어느 날/그는 사냥교본을 나뭇가지에 걸어둔 채/지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있다. 시인 자신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로 놓여 있을 것으로 점쳐지는 ‘사냥교본’엔 ‘첫닭울음소리에 신발 끈을 동여’ 매야하고, ‘찬바람이 주머니 속을 비울 때/목울대를 타고 올라온 울음과 맨주먹으로 싸’우는 일과 그리고 ‘바람이 점령한 들판으로 달려가/곡괭이 끝에 묻은 지난해의 흙을 떨어’내는 일들이 서사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런 고달픔은 온전히 ‘잔뼈의 새, 그들의 방파제’가 되려는 생의 울음소리로 해석된다.
인간의 삶이란 모두가 각자 그 나름의 사냥교본을 쓰는 일이다. 정계원 시인이 「황금털사자느티나무」를 통해 둘려주는 생의 울음소리는 후세들에게 제시하는 문제해결의 사냥교본이며, 이것은 곧 고전과 같은 지침서이다.
5월의 수양버드나무 우물터에서
꿈을 먹던 한 소녀가
병상에서 목관으로 이동 중이다
잔뼈를 키우던 애향단의
까까머리들
도심 속 종탑 위의 밤부엉이로 산다
보릿고개의 9부 능선을 걷던 나는
지금, 배꼽아래
장미축제가 끝난 신전이다
-「안인역 긴 의자에 앉아」 일부
누군가가 인간은 모두 회귀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모두 때가 되면 각자 출생의 근원지로 회귀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육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회귀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반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정계원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지금, 배꼽아래/장미축제가 끝난 신전’으로 만남과 이별의 장소로 상징되는 「안인역 긴 의자에 앉아」서 지난날을 반추한다.
이렇게 반추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회귀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수용된다. 인간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은 ‘죽음’을 가질 때이다. ‘한 소녀’는 ‘병상에서 목관으로 이동’함으로써 그의 삶이 완성되고, ‘까까머리들’은 미완성의 삶을 완성시키려고 ‘도심 속 종탑 위의 밤부엉이로’로 살고 있다. 여기서 ‘한 소녀’나 ‘까까머리들’은 삶을 완성시키지 못한 우리 모두의 상징이다.
시는 주관적 산물이다. 그러나 지나친 주관성을 가질 때 자칫 보편성을 잃고 만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시의 내용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시는 비록 개인의 체험에서 출발하지만 주관화 하지 않는다. 즉 시를 쓰는 과정에서 시적 의미를 주관성에 근거하는 표현주의적 시론, 다시 말해서 시인 자신의 심정, 혹은 개인의 감정을 주관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를 하나의 인식수단으로 보며. 사물의 진리를 밝혀주는 인식론적 시론에 의해 시를 짓는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이러한 시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청자들로부터 공감을 획득한다.
Ⅲ. 미메시스 과정의 미학
Shelley는 그의 「시의 웅호」라는 글에서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바로 인생의 영상이다. 시와 소설은 차이가 있다. 소설이란 시간, 장소, 환경, 원인과 결과 이외에는 여타의 다른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는, 초연한 사실의 목록이다. 그러나 시는 창조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 즉 인간 본성의 불변의 형태에 따른 행위의 창조다. 이것은 모든 다른 사람의 마음의 영상 자체이기도 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시는 시인의 마음에 영상처럼 떠오른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 것이다. 이처럼 Shelley의 주장을 따른다고 할 때에 정계원 시인의 시작품도 Shelley의 정의에 따르고 있다. 다음의 시에서 그것이 확인된다.
거울을 본다 그 속에 한 여자가 있다 어느 한 노파의 딸이다 각이 많은 어떤 사내의 한 여자다 여섯 눈물방울의 어미이다 진열장 속 표정 없는 인형이다 삼류 드라마의 중독자이다 찬장 밖의 빈 접시이고, 커피 잔 속에 빠진 의문의 눈썹이고, 식탁 위에 2월의 초록 사과이고 시력을 잃고 꽂혀 있는 마르크스 전집이다
-「레드 폭스」 일부
시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심상을 언어로 그려놓은 것이 시라고 했다. 앞의 명제처럼 「레드 폭스」는 정계원 시인의 마음속의 영상들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거울 속의 한 여자는 ‘어느 한 노파의 딸’이고, ‘각이 많은 어떤 사내의 한 여자’이며, ‘여섯 눈물방울의 어미’로 회화(繪畵)한 작품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레드 폭스」의 시적 표현은 ‘A=B’라는 은유법으로 원관념인 ‘나’를 보조관념인 ‘여자’, ‘노파의 딸’, ‘사내의 한 여자’, ‘여섯 눈망울의 어미’, ‘진열장 속의 표정 없는 인형’ 등으로 비유했다. 이것은 거울 속의 한 여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병렬적 이미지로 다양하게 제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다. 단순하게 이성을 내세워 그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반복 속에서 ‘나(여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차이를 ‘반복’과 ‘다양’이라는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는 자신을 ‘삼류 드라마의 중독자’이며, ‘찬장 밖의 빈 접시이고, 커피 잔 속에 빠진 의문의 눈썹이고, 식탁 위에 2월의 초록 사과이고 시력을 잃고 꽂혀 있는 마르크스 전집’이라고 했다. 요컨대 그의 정서를 ‘인형’, ‘중독자’, ‘빈 접시’, ‘의문의 눈썹’, ‘2월의 초록 사과’, ‘시력을 잃은 마르크스 전집‘으로 드러내어 시의 정서를 전달한다,
정계원 시인의 「레드 폭스」를 통해 인식의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든 인간은 나약하며 외로운 동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 역시 한 인간으로서 외로운 ‘빈 접시’이며, 실패한 이론서답게 시력을 잃고 홀로 책꽂이에 꽂혀 있는 ‘마르크스 전집’인 것이다. 한 어미로서의 갈대는 위대하며 강하다. 그러나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미는 강하다. 그러나 한 여자로서는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 나약함은 곧 ‘빈 접시’처럼 외로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를 인지시키고 있다.
예시한 「레드 폭스」가 담고 있는 내용은 정계원 시인이 일상에서 체득한 경험이다. Shelley는 “시는 곧 시인의 마음의 영상”이라고 했다. 이 정의를 옹호라도 하듯이 정계원 시인은 ‘강한 여자’, ‘약한 여자’라는 양면성을 마음의 영상으로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대리 경험하게 하여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정화되는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완성을 추구한다. 더불어 정계원 시인은 시의 내용이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을 주관화 하지 않고 객관화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시론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 여자,
석불로 피어난다
-「접시 위에 여자」 부분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서지만
그림자는 집에 있다
-「잃어버린 그림자」 부분
접시 위에 있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접시는 환상의 세계로써 비정상적인 의식의 세계이다. 즉 상식적인 세계의 오류를 범하는 난센스이다. 이것이 시가 된다. 낭만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시를 쓰게 만든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정계원 시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상식의 세계를 뒤엎고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보는 관점을 증폭시키고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정계원 시인이 이러한 시를 쓰게 되는 목적이 무엇일까.
첫째 익살과 유머에 있으며, 풍자까지 넘본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시가 대부분 비논리적이지만, 특히 「접시 위에 여자」와 같은 시는 비논리적이면서 논리적 의미전달을 하려는데 있다. 짜임새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치에 맞는 결과를 드러낸다. 이것은 비논리의 오류이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제1의 의미는 없지만 제2의 의미를 생산하는 데 있다. 현실엔 없지만 미래에 있을 가치의 제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대한 새로운 눈으로 찾아낸 의미와 같은 것이다. 가령 가장 흔한 것으로 생각하는 햇빛을 우리들에게 가장 귀한 존재로 자각하게 만든다. 또한 「접시 위에 여자」는 파편적 글쓰기의 시도이다. 이것은 행과 행, 연과 연의 상호 연관관계를 파괴하는 무의미성의 반영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이웃할 수 없는 것들의 동시적 나열을 통해 그로테스크(grotesque)미학을 보여준다. 가령, 행과 행, 또는 연과 연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앞의 연에서 ‘잃어버린 그림자’로 인식하던 화자는 다음 연에서는 ‘그림자는 집에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상호 모순적·상호 적대적으로 두 진술이 각각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앞에서 예시된 「접시 위에 여자」의 앞의 연과 뒤의 연이 서로 상관관계를 잃고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정계원 시인은 파편적 글쓰기로 각 연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퍼즐조각을 맞추듯이 하나의 완성된 내면세계를 나타내려고 한다. 이것은 결국 만들고, 찾아내고, 재발견하고, 전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는 불연속적인 묘사의 파편들의 이미지망을 통해 시인이 묘사하는 ‘내적풍경(paysage interieur)’의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은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외기러기 떼들마저 어둠을 잘게잘게 깨물며
강문을 찾아드는데,
개밥바라기별이
만취된 사내를 기다리는 나를 힐끔 본다
핸드폰이 머리를 흔들어댄다
“늦을 거야”
흰 머리카락 한 올 뚜∼욱 떨어진다
ㅅㅂㅅㅂ
-「골빈 여자」 일부
시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는 한 줄의 문장으로 열 가지의 뜻을 전달하는 복수발화 양식이다. 흔히 시가 언어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인이 어떤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까닭이다. 정계원 시인은 자신의 심상을 「골빈 여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골빈 여자’는 상식 밖의 뜻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골빈 여자’가 골이 텅텅 비어 있는 비정상적인 여자가 아니라 ‘만취된 사내’를 어떤 경우라도 기다려야 하는 극히 정상적인 한 여자라는 뜻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시는 의미를 설명하는 형식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을 갖춰야 한다.
이미지는 상상력(imagination)의 산물이다. 이것은 상상력뿐만 아니라 지각·기억·환상·공상· 연상 등을 통해서도 생산된다. 부연하면 상상력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또 만드는 정신능력이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추상적 개념조차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한다. 예를 들면 추상적인 개념인 ‘시간’을 정계원 시인은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에 노력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식탁엔 나비넥타이를 맨 시간이 앉아 있고/여자의 정신은 창 밖에서 서성인다’는 표현을 그 예로 삼을 수 있다. ‘시간’이 앉아 있다고 의인화 하는 것 자체도 ‘추상’을 ‘구상’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더구나 ‘식탁에 나비넥타이를 맨 시간이 앉아 있고’는 추상적인 개념의 ‘시간’을 물질적인 이미지화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또 다른 특이점은 골계미를 담고 있다. 문학의 기능은 쾌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이 진술했던 ‘핸드폰이 머리를 흔들어댄다/“늦을 거야”/흰 머리카락 한 올 뚜∼욱 떨어진다/ㅅㅂㅅㅂ’에서 소위 통신언어로 분류되는 ‘ㅅㅂㅅㅂ’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시는 의미전달이 목적이라고 했다. 구태여 설명을 곁들어가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은 ‘ㅅㅂㅅㅂ’이라는 육두문자를 통사규칙 파괴라는 방법으로 그 뜻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Ⅳ. ‘나’의 휘브리스에 대한 경고
인간의 오만(傲慢)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써져 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는 뜻이다. 갑자기 부를 거머쥐거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고 사는 것이나, 역사적 교훈을 잊고 자신을 과신하여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행동을 가리켜 오만이라고 한다. 정계원 시인은 여러 작품을 통해 인간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교정하고 있다.
그의 무릎 밑에
직립의 맹수들이 일렬로 서 있다
뼈를 발라내기 시작한다
캔, 맥주
오렌지
봄, 한 조각마저
그의 갈비뼈 하나둘 잘려 나가는
오후 2시
선지피, 한 모금
봉봉
사과즙
암사자가
꽃사슴의 푸른 영혼을 발라먹듯
하이에나들의 식사
우주가 쨍, 금이 가는 소리
-「자동판매기」 전문
정계원 시인의 「자동판매기」는 이성을 앞세우고 중심으로 들어가 그 무엇을 찾아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동전으로 교환된 ‘캔, 맥주/오렌지/봄, 한 조각’으로 직립의 맹수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에서 발생된 모순에 대한 고발이다. 즉 인간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소비자가 구입한 물건을 사용하던 말든, 또는 먹든지 말든지 판매자는 이익만 취하면 된다는 교환가치가 가지고 있는 모순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의 잉여가치 부분에서 토지지대 혹은 자본투하의 명목으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즉 교환가치가 상대적으로 착취구조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자본가들은 ‘선지피, 한 모금/봉봉/사과즙/암사자가/꽃사슴의 푸른 영혼을 발라먹’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행위들을 ‘하이에나들의 식사’로 보았고, 이 하이에나들의 식사는 결국 ‘우주가 쨍, 금이 가는 소리’로 보았다. 인류의 멸망은 그 원인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으며, 그것에 대해 자성할 것을 시인은 촉구한다. 정계원 시인은 현대인들이 인간의 생존권과 동·식물의 생존권을 공평하게 인정하며 자연을 인간과 동일하게 여기는 의식을 공유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흰 머리칼 날리며 컴퓨터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어느 상가의 PC 수리점 앞에,
*병원 진료 과목*
⇩
* 내 과 : 밴댕이 속 수리전문, 출장 내시경
* 신경외과 : 부르주아는 접수 불가
* 외 과 : 슬픔의 제모 제거
* 성형외과 : 계란형 얼굴 - 추가비용 부담
* 산부인과 : 생리기간 업그레이드, 불륜상담 절대불가
* 정 신 과 : 초진, 치매예방용 싸이 말춤 지도
혈액형을 알 수 없는 전자꽃이 핀 영안실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몰락」 전문
시인은 「지구의 몰락」에서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 시는 사회나 삶의 모순되고 불합리한 점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냉소를 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풍자시는 ‘사회, 인물의 결함, 죄악, 모순 등을 정면에서가 아니라 우회적으로, 또는 여러 가지 비유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재치를 활용하여 어르거나 혹평 또는 폭로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지구의 몰락」은 인간내면에 새겨진 사상과 관념, 개인의 욕망과 본능, 인간의 뇌에 각인된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배금사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이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병원의 진료과목이 정상적이 아니다. 즉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실부정의 한 형태를 나타낸다.
* 내 과 : 밴댕이 속 수리전문, 출장 내시경
* 신경외과 : 부르주아는 접수 불가
* 외 과 : 슬픔의 제모 제거
* 성형외과 : 계란형 얼굴 - 추가비용 부담
* 산부인과 : 생리기간 업그레이드, 불륜상담 절대불가
* 정 신 과 : 초진, 치매예방용 싸이 말춤 지도
내과의 진료과목이 ‘밴댕이 속 수리전문, 출장 내시경’이며, 신경외과는 ‘부르주아는 접수 불가’하다. 산부인과의 진료과목은 ‘생리기간 업그레이드’는 가능하지만 ‘불륜상담 절대불가’를 선언한다. 시인은 어느 상가 앞엔 ‘혈액형을 알 수 없는 전자꽃이 핀 영안실/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정서를 나타내며, 극히 냉소적인 입장을 취한다.
풍자로 모순된 사회를 일갈하는 정계원 시인은 불합리한 사회적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관심을 둔다. 이 때 표출되는 시인의 의지는 주관적이거나 개별적이 아니다. 객관적이면서 집단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지구의 몰락」의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감정은 온화하고 섬세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오로지 분노와 증오, 그리고 냉소·멸시·해학을 동반한다. 채근담에 “탐욕이 많은 사람은 금을 나눠 줘도 玉을 얻지 못함을 한하고, 公에 봉하여도 제후(諸侯)가 못됨을 불평한다”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지구의 몰락」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 이 욕망과 인연을 끊으려면 자학과 순교의 고통을 동시에 수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균형잡힌 식단이라고 했어
⤷살짝 데친 증오 무침 10g이야
⤷참사랑 한 근 두고 가기로 했어
⤷포장배달 가능한 민주주의 1리터야
⤷정제된 분노만 사용해
쭈
우
욱
쭉, 하지만
아프리카엔
한 조각의 보리빵이 필요해
-「나쁜식당」 일부
위의 「지구의 몰락」과 「나쁜 식당」의 두 작품은 불합리한 사회와 모순된 제도에 대해 풍자 형식을 빌려 비판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풍자의 양상은 서로 사뭇 다르다. 「지구의 몰락」이 직설적·적극적·냉소적으로 비판한다면 「나쁜 식당」은 죄악에 대해 우회적·소극적, 또는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측면 혹은 다른 이면으로부터 비판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통쾌미는 없으나 찌르고 질식시킬 만한 신랄미와 심각미가 있다. 또한 「나쁜 식당」은 댓글형식의 회화(會話)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전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좀 더 친근감이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다가간다.
균형 잡힌 식단은 ‘살짝 데친 증오무침 10g’며, ‘정제된 분노만 사용’한다는 표현으로 권유와 청유 형식으로 비판하며, 나쁜 식당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쁜 식당」은 독자가 아닌 청자를 염두에 둔 전형적인 가창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정계원 시인은 예술적 형상화를 고려하기에 앞서 예술적 진실을 강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의 풍자시는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너를 가입한다
5만원 받는다
10만원 받는다
너를 인출한다
KBY5.com
그 양심을
모조리
인출하고 싶은
넌
누구니?
-「스팸메일」 일부
정계원 시인의 시적 경향은 모더니즘의 계열로 매우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것은 현대성(modernity)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때로는 자아와 세계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서정성을 언뜻언뜻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가 대립하는 현대시의 기능을 더 많이 나타내는 시세계를 보이고 있다. 이 「스팸메일」에서 볼 수 있듯이 자아와 세계는 절대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극점에 있다.
요즘 불특정다수인에게 무차별적으로 광고 우편물이나 e메일을 보내는 ‘스팸(Spam)메일’의 폐해가 심각하다. 각 가정의 우편함과 개인들의 e메일에 원치 않는 ‘쓰레기(junk)메일’이 폭주하여,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송신자보다 수신자의 비용 부담이 더 크다는 점과 개인정보 침해로 e메일 계정사용의 비효율성이 하나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폐해를 줄이고 시정하려고 ‘그 양심을/모조리/인출하고 싶은/넌/누구니?’로 노골적인 질타와 조소를 보낸다. 특히 ‘KBY5.com’라는 계정을 밝힌다는 것은 시인의 강직한 경고메시지이다. 이것은 몰염치한 인간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이다. 주지하듯이 「스팸메일」은 비유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정계원 시인이 시작품 속에 작의(作意)를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대상을 시적으로 형상화를 했다기보다는 노골적인 질타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Ⅴ. 에필로그
정계원 시인의 시집 『접시 위에 여자』를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인상 깊게 드러낸 것을 요약하면 먼저 소재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내면 세계와 타인의 죽음을 자기 것으로 대상화하는 시적태도, 또 사회·경제문제와 관련된 어두운 부분을 풍자형식을 빌려 결코 좌시하지 않는 모습 등, 소재의 다양성은 정계원 시인이 끝까지 짊어지고 갈 짐이다. 특히 그의 시적 경향이 모더니즘의 계열의 속하지만 시의 내용들은 그다지 건조하지 않다. 이 점 또한 다른 시인들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정계원 시인의 특이점이다. 일종의 주정적 주지시로서 그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는 창작기법을 따르고 있다. 그 까닭은 독자들의 지각의 자동화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시의 현장성이 강하다. 현장성의 극대화는 다시 구체성과 즉응성, 계속성으로 이어져 시의 밀도를 높이며 시작품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부연하면 어떤 상황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거나 발생한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장감은 독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서술형의 시제를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녹화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이라는 것이다. 현재성과 순간성은 전통시든 현대시이든 양자 모두 요구되는 시적장치이다. 비록 지난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생동감을 갖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은 다시 언어의 현장성을 요구하는 일이며, 이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복합적 의미를 제공한다는 특별함이다.
셋째, 삶의 방식을 미학적으로 작품에 반영시켰다. 서구 고대 예술론의 중심적 생각은 예술이 현실의 미메시스(mimesis)라는 것이었다. 즉 모방은 재현·묘사·표현의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계원 시인은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데아의 관점에서 예술이 외면세계의 충실한 복제라는 단순모방론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예술이 실재를 모방하지만 시인 나름대로 실재를 나타내는 길이라는 본질모방의 주창이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의 시작품 속에는 ‘인간의 죽음’이 차용되거나 변주된 상태로 반영되어 있다. 이데아 세계의 모방으로 경험현실이 존재하고, 정계원 시인은 그 경험현실을 미메시스 하고 있다. 요약하면 그는 보편적·전형적·필연적 방식으로 사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복제와 표현이 혼합된 창조모방의 입장에 서 있다.
넷째, 그는 시적 사유가 개방적이다. 이것은 시의 소재가 다양하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첨언하면 정계원 시인의 사유는 한 곳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늘 부유한다. 그러나 노마드적 사유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노마드적 사유는 그 영혼이 자유로워 횡단하며, 미끄러지지만 정계원 시인의 사유의 개방성은 사물을 보는 관점의 다각적인 층위의 표방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소금여자’, ‘레드폭스’, ‘행주치마반란’, ‘접시 위에 여자’, ‘골빈 여자’, ‘누드’, ‘모두 연극이야’와 같은 작품들은 여자의 내면풍경을 이미지로 담백하게 그려냈으며, ‘세라비’, ‘샤갈연가’, ‘그동안’, ‘또 먼 생각’, ‘그림자 방’과 같은 작품들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정서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또 ‘슬픈 물음표’, ‘휴면계좌의 내력’, ‘삐에로의 아리랑’, ‘자동판매기’, ‘8월의 전광판’, ‘그릇이 경전이다’와 같은 작품들은 인간과 경제의 상호텍스트성을 집요하게 물으며, 그 해답을 독자와 함께 찾는 작품들이다. 이러한 사유의 개방성은 대립의 구도를 타파한다. 선과 악, 여자와 남자, 높고 낮음, 길고 짧음, 부와 가난, 자연과 문화의 경계성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런 행위는 의식의 개방성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가령, 진보와 보수, 옛것과 새것의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을 두루 포용하는 중용의 정신이다.
다섯째, 시적 소재를 대상화하는 작업에 고뇌한다. 즉 어떠한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황금털사자느티나무’, ‘신경안정제’, ‘피자두’, ‘계백로 16번길 홍시’와 같은 작품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의 죽음의 대상은 모두 다르다. 다른 죽음의 대상을 보편화하고, 자기대상화로 삼음으로써 대립적인 세계가 아니라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정계원 시인으로부터 온정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개인시집을 상재하고 나면 대부분의 시인들은 모든 존재의 진리를 명증적 의식으로부터 전부 획득했다는 착각을 한다. 그리고 시작(詩作)활동을 게을리 한다. 그러나 한 권의 시집 상재는 시인으로서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술의 시간적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상기하여 정계원 시인의 두 번째의 시집도 조만간에 상재될 것을 기대하며, 다시 한 번 첫 시집 『접시 위에 여자』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혼자 가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실려 가며 소멸된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벌써 5월이다.
-출처 : 2021년 《스토리문학》 하반기호에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