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섭-(평론)트라우마로 생애를 통찰하는 시간
트라우마로 생애를 통찰하는 시간
심은섭(시인ㆍ문학평론가)
1. 우울도 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연성이 문학의 허구성을 정당화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테면 문학은 특수한 사실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역사와는 다르게 개연성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어떠한 사실을 취급함에 있어 보편타당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허구를 사실화 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허구의 산물이라고도 하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기도 한다지만 현실과 단절 없이 마냥 현실이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를 행동으로 모방하거나 반영한다고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론(mimetic theories)을 주장했고, 또 소위 이것을 유희(遊戱, play)라고도 했다. 즉 시(詩)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모방론적 관점에서 정의 한 것이다. 첨언하면 현실적인 상황을 문학의 1차적인 관심으로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부분들을 중심문제로 다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워즈워드와 J. S 밀이 지지 했던 입장으로 시인 자신의 생애에 중심을 두는 표현론(expressive theories)이 있다. 즉 시란 자기표현이라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는 독자들에게 끼친 어떤 ‘효과’에 주목하며, 시를 하나의 ‘전달’로 보는 효용론적 관점이 있다. 끝으로 언어의 표현방식과 내적 짜임새, 플롯(plot)등을 분석함으로써 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는 해석 방식인 구조론이 있다.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 가며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영순 시인의 시관을 어느 관점에서 바라봐야 적확성(的確性)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높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관심으로 이영순 시인의 첫 시집 『액자에 갇히다』에 실린 시편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그의 시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모방론 관점에서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모든 작품에 그가 살아오면서 느낀 삶이 반영되어 있고, 언어로 그 경험들을 재현, 또는 재생시킨 것이라는 데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외로움의 연속이다. 이 외로움은 불교의 연기설로 말하면 즐거움이 있어 외로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어 즐거움이 있다. 따라서 외로움은 간혹 즐거움을 지탱해 주기도 하지만 바삐 살다보면 때대로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거니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종종 외로울 때도 있다. 이영순 시인은 시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인들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만끽하려는 이탈의 습성에서 시를 쓰기도 하고, 문득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을 때 시를 쓴다. 그러므로 이영순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도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만의 가치를 만나는 순간이며, 이 가치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외로움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시는 자기감정의 발로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시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가 정한(情恨)의 미학이다. 李 시인 역시 앞의 명제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영순 시인의 첫 시집 『액자에 갇히다』속의 시세계를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두 번째로는 이러한 전신적 외상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통찰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통찰의 시간들은 결국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이며, 자아의 재발견이다. 이 같은 재발견은 부끄러움이라는 성찰의 시적 태도를 보이며, 다시 액자에 갇히는 삶의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는 그의 첫 시집 『액자에 갇히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회의와 무력감, 그리고 허무적인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삶을 안주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식 속에서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찾으려고 끈질긴 노력이다.
우리는 그의 첫시집 『액자에 갇히다』가 품고 있는 시작품들을 통해 이영순 시인이 지니고 있는 시의식과 시관이 무엇인가를 더 꼼꼼하게 찾아보는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2. 에곤실레(Egon Schiele)의 침묵하는 절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우울한 정서’라는 것은 매우 즐거움에 대립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우울히 지니고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먼저 주체의 자기분열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 자기 소외를 통해 자아 상실을 가져온다. 이것은 삶의 허망함, 단순한 환상의 세계가 깨질 때 찾아온다. 허망함과 환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거나 깨어나기 위해 이영순 시인이 노래하는 우울은 하나의 미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것도 직선적인 삶의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 말이다. 그는 또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삶’을 확장 은유라는 비유로 그려내는 작업에 몰두 한다.
5일 전에는 5cm 원을 그렸고
다음 날엔 3cm
다시 6으로 갔다가
어제는 한 점
늘 수 없는 탈출을 꿈꾸며
멀리 가까이
내 주변을 맴돌지만
어김없이 제자리로 와 눕는
이제 낡은 컴퍼스 하나
-「결혼」전문
여기에서 알레고리 형식을 빌려 이미지화가 가장 잘된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결혼」의 시 전문(全文)을 소개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시인이 걸어온 생애의 총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적인 측면으로 말하자면 1연은 지난날의 기억으로 원경에 해당되며, 2연은 중경과 같다. 3연은 근경으로써 현실을 사실화하고 있다. 반복되는 나날들은 그에게 비루한 억압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유교적인 관습에 질곡 된 한국 여인들의 자화상이다. ‘5일 전에는 5cm 원을 그렸고/다음 날엔 3cm/다시 6으로 갔다가/어제는 한 점’이라는 구절에서 사회제도로부터 규제되는 여성으로서의 자유는 실종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부정된 내면세계를 긍정적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억압하는 규범들을 부정하지 않고 개방적 세계를 동경하는 차원에서 머무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영순 시인이 모순된 사회 제도라도 순응해야한다는 절대적인 한국의 여성상을 이미지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폐쇄적인 자아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찾는 일에 젊은 날을 소진했다. 언뜻 보기에는 「결혼」의 시작품이 보여주는 시적화자의 어조가 매우 불안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부정을 부정하고 긍정을 긍정하는 내면세계를 보여 주기 위한 철저한 자기선언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릇 밀도가 높은 금속일수록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사고의 깊이를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마지막 부분의 ‘이제 낡은 컴퍼스 하나’는 한낱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완성된 자신의 내면세계를 낮은 자세로 은유하는 것이다. 글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지적 수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글 쓰는 태도이다. 따라서 이영순 시인은 시인으로서 자기성찰을 하는 태도를 표본으로 보여 주고 있음을 여러 시편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검정 우산 하나
빗길에 누워
행인이 밟고 지나간다
꼿꼿하던 자존심은 어디가고
불시착된 낙하산처럼 뭉그러져있다
젊음은 낡은 거미줄처럼 붙어있다
신음소리만 조용히 앉아있다
와륵 외로움이 빗물처럼 튀고
검은 눈물만
도로를 적신다
-「노인」전문
이 「노인」의 시작품에서 이영순 시인은 삶의 실체에 대한 회의와 향후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 「노인」의 시작품은 인간의 육신을 파괴하는 시간의 실체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영순 시인은 자신의 시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절규ㆍ비명’과 같은 극단적인 시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품 속에는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외적 절규가 아닌 에곤실레(Egon Schiele) 의 침묵의 절규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시 작품들은 내성이 강화된, 그러나 원형의 변형을 가져오지 않는 몸을 가진 아메바처럼 절규한다. 이처럼 그는 ‘시인과 이영순’, ‘이영순과 시’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성을 확보된 상태에서 하나로 존재하려고 한다. 다만 존재로서의 인간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존재성을 확보하려고 할뿐이다. 그의 시작품들은 결국 이영순 시인의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그리고 아직까지 바깥으로 표출되지 않고, 통제되고 있는 억압의 덩어리들이다.
키 작은 12월의 태양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날아
오른다, 하지만
시든 진달래꽃이다
판도라박스,
빛바랜 머플러이고
겨울 외투 속의 나다
-「12월의 해바라기」부분
위의 시작품은 「12월의 해바라기」의 2연과 3연이다. 이 작품의 시적 공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시적 화자의 정서는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 등 어둡고 부정적인 결핍 의식으로 착색되어 있으며, 심리적 양상이 이분화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2연의 ‘키 작은 12월의 태양은/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날아/오른다’에서처럼 그가 보여준 심리적 상태는 매우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하지만’으로부터 시작되는 3연은 ‘시든 진달래꽃이다/판도라박스,/빛바랜 머플러이고/겨울 외투 속의 나다’와 같이 매우 암울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요컨대 2연과 극히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시창작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다. 내용은 형식을 떠날 수 없고, 형식은 내용을 떠날 수 없다. 먼저 형식에 대해 말해보면 2연의 ‘밝음’을 통해 3연이 담고 있는 암울한 의미를 대조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심리 상태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나’가 ‘시든 진달래꽃’이고, ‘판도라박스’이고 ‘빛바랜 머플러’이며, ‘겨울 외투 속의 나’라는 의미를 아주, 그것도 뚜렷하게 돌출시키기 위한 하나의 낯선 창작기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첨언하면 2연의 ‘12월의 태양’은 밝음을 의미하지만, 시든 진달래꽃, 판도라박스, 빛바랜 머플러는 황량한 내면의 상징이다. ‘나’와 비유되는 시적 대상들을 이영순 시인은 시적화자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객관적 상관물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집요하고 완강하게 일면적인 자기 아픔을 주장하는 참으로 무리 없는 노래를 한다.
형식을 배제하고 내용만을 가지고 따져 보면 우울과 고독, 그리고 한숨은 이영순 시인의 삶의 정신적 외상(外傷)이다. 그러나 이 트라우마가 정신적 분열의 양상을 가져오는 고통이 아닌, 오히려 그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에너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작품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내 마음은 감빛노을
소리는 슬픈 은율
홀로된 가을과 싸우며, 난
어머니의 교차로를 건너고 있다.
-「어머니의 교차로」일부
지금까지 겪어온 마음의 외상들, 즉 우울과 고독, 그리고 한숨은 ‘어머니의 교차로’를 건너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通過儀禮)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외상은 독선적 의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앞의 「어머니의 교차로」에서 확인되듯이 아직도 이영순 시인에게는 ‘소리는 슬픈 은율’이고 ‘홀로된 가을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들이 결코 낭만과 타락으로 질주하거나, 히스테리의 증상이 아닌, 더더욱 한낱 데카당스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들은 하나의 여자에서 하나의 어머니로 성장하는 과정의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데에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영순 시인이 노래하는 아픔은 어머니가 걸어온 교차로를 자신이 똑 같은 방법으로 걷기위한 제2의 꿈이다. ‘어머니의 교차로’는 오늘날 사회제도와 규범들이 ‘어머니’라는 명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형 어머니들의 자화상이다.
싱싱한 잎들 사이로
내 하늘은
꽁꽁
얼어있다
눈사람처럼
가만히
기대본다
나무도 속으로
앓고 있다
생의 감기몸살을
나도
앓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일부
시인의 현실인식이 암시적으로 표출되는 시편(詩篇)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몸 밖으로 투사한다. 이렇게 짧은 시작품에서 그의 일상생활들이 건져 올려지고, 독자들과 소통되는 ‘긴장과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의 심경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영순 시인은 ‘싱싱한 잎들 사이로/내 하늘은/꽁꽁/얼어있’을 때 나무와 함께 ‘생의 감기몸살을’ 앓고 있다. 나무는 자연이며, ‘나’는 인간이다. 이것은 단절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동양의 일원론적 사상에서 비롯된 시적 사유이다. 이렇듯이 이 시인은 시적 대상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하지 않는다. 곧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며,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노래한다. 즉 인간(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이렇게 자연에 순응하는 李 시인의 시적태도를 보노라면, 그의 시세계가 포용과 포괄적인 상상력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앞의 「나무 아래에서」의 나무는 시적화자의 ‘불안의 서식처’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안식처이다. 이 안식처의 고통이 이영순 시인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같음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안식처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인류를 위한 소극적인 자세, 서로 흉금을 털어놓지 않는, 그리고 낯가림하는,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주위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날 세태에 대한 비판적이다.
인간의 행동은 주체의 측면에서 상당히 제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영순 시인의 상상력은 결코 제약된 행동이라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시를 통해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삶의 진행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를 묘사하려는 의도로 보기 때문이다. 혹, 그가 센티멘탈(sentimental)적이라고 치부한다손 치더라도 유쾌한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까닭은 초기의 시작품에서는 트라우마의 현상을 노래하지만 다음과 같은 시작품에서 그의 시적 태도가 성찰의 시의식으로 바꿔가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의 시계는 정상출근
그 뿐
-「거래와 거래」일부
이라고 주장한다. 생의 감기몸살을 앓고 난 이영순 시인의 생애는 이제 눈부시게 정상이다. 영원한 인간이 지녀야하는 고품격의 건전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필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시, 구원하다’로 명명할 수 있다. 첨언하면 ‘낡은 컴퍼스’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던 그는 생의 구원을 시에서 찾았고, 시 또한 그의 손에서 구원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습관은 제2의 본성이며,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고 했다. 이영순 시인은 습관적으로 ‘나 중심’의 시를 쓴다. 그렇다면 파괴된 제1의 본성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습관으로 시를 쓰고 있다. 이것은 취미로 시를 쓰는 아마추어 시인이 아니라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린 풀잎
하나에도
그득 담긴
생의 뜻
왠지 부끄러워
그대를 피한다
뭘 했지
난
-「봄은 오는데」일부
위의 「봄은 오는데」를 읽어보면 이영순 시인의 시 창작 태도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성찰하는 시적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성의 회초리로 자신을 후려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각성하고 있다. ‘여린 풀잎/하나에도/그득 담긴/생의 뜻’이 분명한데, 자신의 삶의 무늬가 분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여린 풀잎’을 바라보며 ‘왠지 부끄러워 그대를 피’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뭘 했지’라며 반문하는 것은 지금까지 어설프게 엮어온 자신의 삶에 대해 강하게 질타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결정적으로 부끄러운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아이러니(irony)인 것이다.
성찰하고 반성하는 인간은 늘 새로운 행동 양식을 생산한다. 이영순 시인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성과 성찰을 함으로써 시세계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개연성을 희구하는 일이다. 이제 그는 공허한 우묵함에 결부된 실존적 감정들을 야기하며 노래하지 않는다.
돌탑처럼 꿋꿋하고
어떤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중략>……
신은 없다
루비목걸이가 내 몸에서 자라고
욕망은 분수처럼 솟구친다
내 피는 진한 잿빛이다
잿빛 아기가 저울대에 매달려있다
인도, 3세, 3kg의 사진
내 탑이 단단해진다
-「나의 탑」일부
앞의 시편들에서 읽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영순 시인은 결코 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즉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자신의 일상세계를 홀로 역주행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위기감이나 불안감을 오히려 후반에 들어오면서 견고한 자신감으로 만들어 간다. 또 지금까지 보여준 서정적 감정은 ‘내 탑이 단단해’짐으로써 응고 현상이 취약한 침전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경우를 우리들은 그의 시의식이 시인의 몸을 관통했다고 말 할 수 있고, 이러할 때 한 편의 시는 세상에서 빛을 발광하게 된다.
그의 첫 시집 『액자에 갇히다』의 전반부 시작품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오던 이영순 시인은 ‘신은 없다’는 절대자의 부재 속에서도 자신의 순수성과 견고함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는 언어로 시를 빚어내는 예술가로서「나의 탑」에서 ‘신은 죽었다’고 극단적으로 한 말은 신의 완전성과 물심이원론의 기계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삶의 원리,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지고(至高)의 가치나 잃어버린 목표에 대한 참회적인 반항이 될 수도 있다. ‘루비목걸이가 내 몸에서 자라고/욕망은 분수처럼 솟구’치는 존재의 본질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에서의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이 분수처럼 쏟아지는데, 이 욕망을 제어해 줄 그 무엇, 즉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피안(彼岸)의 세계가 아닌 차안(此岸)의 세계를 시의식의 본질로 삼는다. 그래서 그는 매우 현실적이다. 세 개의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를 놓고 볼 때 그에겐 오직 현실만이 존재하는 시간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유로 생각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의 시적 사유는 얼음보다 매우 차갑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가 이성(理性)을 앞세운다는 것은 이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선 매우 못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자기 보존 수단이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독단의 세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나의 탑」에 ‘신은 죽었다’고 노래한 부분은 모든 것이 ‘나’가 중심이 되는 실존주의에 맥이 닿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존주의자 장폴 사르트르도, 니체도 모두 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나’ 중심임을 주장했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차창 밖을 바라보던 나의 생,
액자에 다시 갇힌다
-「제재소 사람들」일부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적 본질을 가장 순수한 의지이며, 유일한 가치의 최고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이영순 시인이 시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그 성찰의 결과는 지금 살아온 흔적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재소 사람들」에서 ‘차창 밖’이라는 것과 ‘액자’라는 공간적 배경이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장 밖’이라는 공간적 배경 속의 제재소 사람들과 차장 안이라는 배경 속의 시적 화자는 서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 공간은 해체된 상태이다.
차장 밖의 공간과 차장 안의 공간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시인의 의식 속에 이미 해체되어 있다. 물심이원론적인 이미지들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킬 경우, 결코 따뜻한 시를 생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시의 밑바닥에 철학이 상실된 상태에서 지어진 시라면 단순한 일상어이거나 말장난에 떨어질 공산이 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재소 사람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표현으로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면서 소시민의 따듯한 노동의 즐거움을 서정적으로 잘 그려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서정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강열한 자기 성찰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데에서 그의 시의식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소시민들의 노동이 시인의 눈에는 어찌 보면 자유로운 광경으로 다가왔고, 오히려 그런 자유로운 노동과 비교되는 시인 자신은 액자 속에 갇혀있는 환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초겨울 바람이 발걸음 재촉하는
늦은 귀가 길
어둠은 곳곳에 잠복하고 있고
붕어빵 장수도 주섬주섬
남은 반죽 밀어내어
마지막 손님인 듯 두텁게 하루를 굽는다
낡은 잠바와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머플러
그들은 종일 함께 함도
모자란 듯 속삭임
그들의 등 뒤로 오고가는
키 작은 아이들의 저녁이야기
비누방울처럼 솟는 내일이 푸르다
-「부부불이」전문
하루 종일 속삭이는 붕어빵 장수 부부가 시적화자(話者) 자신의 시야에 잡힌 부부불이(夫婦不二)의 장면은 욕망의 결핍이 불러오는 중대한 성애(性愛)적 갈등을 불러왔다. 또 이것은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영역이며, 이 상상계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파편을 선택하여 그 파편과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하고, 또 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지각된 것에서 자아의 상상적인 완전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따라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으며 욕망의 대상은 끊임없이 달아난다.
이런 것들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이 본능을 시인이라는 주체가 언어라는 도구로 간결하게 터치하여 미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본질을 표현의 도(道)라고 말 할 수 있다.
3. 다시 액자에 갇히다.
액자는 액자가 아니다. 李 시인이 사유하는 액자는 그가 속해있는 사회제도이며, 규범이다. 한 여성으로서 이런 사회제도와 규범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반면, 한 시인으로서는 억압된 제도로부터 초월하려는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젠 그는 액자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늘 상존하는 것이고, 이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몸부림도 누구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액자에 갇히다』를 읽으면서 억압의 몰락을 느낀다. 왜냐하면 액자는 폐쇄된 공간이 아닌 개방된 자아실현의 세계로서 이영순 시인에겐 피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애매함과 모호성, 그리고 당혹감으로 『액자에 갇히다』라는 서사시 한 편을 읽었다. 일상에서 얻어진 소재로 불완전한 언어를 통하여 시적 이미지를 완성하려는 애쓴 모습이 처절하듯 뚜렷하다 끝으로 이영순 시인의 첫시집 『액자에 갇히다』를 보노라면 유년시절의 연두빛 원피스가 떠오르고, 흑백사진 속이 완두콩이 따스해 지는 것을 느낀다. 다시 한 번 첫 시집 상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