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섭- 시의 강을 건너려는 시인의 아우성(정계원 시인)-모던포엠 9월호 평론
[모던포엠 2016년 9월호] - 정계원 시인의 詩評
시의 강을 건너려는 시인의 아우성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Ⅰ. prologue
시는 자아를 완성하려는 시인의 몸부림의 일체이다. 그때 수반되는 것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이다. 그 고통을 즐길 때 한 편의 시가 탄생된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탄생되는 일이 최종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즉 완성되어야 한다. 그 완성을 이룰 때 교시적·쾌락적이라는 문학의 기능으로써 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성시키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따라서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일과 완성되는 일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결과물이다.
작금의 한국 시단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 시인이 많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는 시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시단의 문제점이다. 시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그 시의 가치 또한 높아진다. 그러므로 시의 완성도는 시의 가치와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의 완성도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정계원 시인의 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그의 시 10편을 예시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그 시 속에 어떠한 시적 장치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는지 그 까닭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 시의 내용 분석도 함께 곁들인다. 시평의 대상자인 정계원 시인은 2007년 『시와세계』로 등단했다. 그러면서 줄곧 시를 써왔다. 그런 지속적인 창작활동은 전업주부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 시인은 매년 중앙 문예지에 다수의 신작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역문단 활동도 남다르다. 강원현대시문학회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강릉문인협회 사무국 간사를 맡아 봉사하고 있다. 이런 점이 정계원 시인에게 활동하는 시인으로서 조명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향후 그의 詩창작 행적을 더욱 기대하며 작품 하나를 먼저 꺼내본다.
Ⅱ.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자극과 이미지
정계원 시인은 2015년 10편 이상 중앙문단 문예지에 신작을 발표했다. 한 해에 발표한 신작이 무려 10편이라는 숫자는 사실 적은 양(量)의 발표작이 아니다. 아래의 작품은 정계원 시인이 2015년 『시산맥』 여름호에 발표했던 「샤갈연가」이다.
눈 내리는 날 액자 바깥으로 넌 사라지고 그 액자 속으로 무덤이 들어올 거야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는, 너를 닮아갈 이름표가 없는 유성이 될 거야
「샤갈연가」 일부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시의 소재로 삼는 예는 그리 드물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며, 한 사람의 완성된 삶은 죽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정계원 시인의 「샤갈연가」도 죽음을 소재로 하는 예외 된 작품이 아니다. “알라스카에서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별들, 그것으로 만들어진 영혼의 덩어리를 술잔에 부딪치며 너의 생각에, 난 담배연기에 잠길 거야”라는 시구에서 시적화자는 죽음의 색깔을 점치고 있다. 사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담배연기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사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현재의 행동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재에 페인팅하고 있는 삶의 행동이 사후에 결정될 죽음의 색깔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작품속에 사걀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대비시켜 용해시키고 있다.
샤갈은 누구인가. 그는 1887년 7월 7일에 러시아 제국 리오즈나(현 벨라루스)에서 유대인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 비쳅스크의 인구는 약 66,000명 정도였고, 그 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비쳅스크는 유대인들의 빈민촌에 지나지 않는 판잣집과 가난한 거리, 성당의 종탑들이 높이 솟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에 고향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타향 프랑스 파리에서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샤갈은 이러한 전쟁과 잔학, 유혈로 가득 찬 한 세기를 보낸 화가이다. 따라서 그의 화풍은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내용,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향수, 유대인 특유의 전통과 상징에 대한 경애 등이라 할 수 있다.
정계원 시인, 즉 시적화자는 자신의 삶과 운명의 명암이 샤갈의 운명에 대비시켜 나간다. 이런 사유는 미적 기능과 함께 성정(性情)의 소박한 발현만이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개념이나 이미지를 서로 연계시킴으로써 정교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비평가들은 ‘부조화의 조화(discordia concors)’로 명명했다. 따라서 샤갈의 삶과 시적화자의 삶은 별개의 것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말미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상이한 개념과 이미지들을 무관계적으로 결합하여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시작(詩作)의 수사법상의 은유를 뜻한다. 또한 이런 무관계를 은유는 구체적 이미지와 추상적 관념, 사상과 감정, 현실과 이상, 영혼과 육체, 광명과 흑암, 천국과 지옥 등의 양극화를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서로 끌어당기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극적 효과가 아닌 느리면서 긴장을 가져다주는 감정표출의 감각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샤갈연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시는 개인의 체험이 근저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경험을 재연하거나 확장, 또는 전환시켜 보편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정계원 시인도 자신이 경험했던 향수, 유년의 아픈 상처들을 샤갈의 삶에 대비시켜 이중적 구조로 주제를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다. “어둠이 두꺼워진 하늘, 유골단지에 부딪혀 눈동자 속으로 산산이 쏟아져 내려, 서늘한 얼굴에 샤넬파우더로 주름살을 펴주고 싶어 그때 비로소 영혼이 목관 속으로 향할 거야”에서 시적화자는 목관 속으로 들어갈 때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서늘한 얼굴에 샤넬파우더로 주름살을 펴주고 싶어”질 때 비로소 목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름살이 갖는 의미는 각각의 생의 무늬다. 어떤 생의 무늬를 지녔든 죽음 앞에선 그 무늬를 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흔히 끝은 시작이라고 한다. 죽음 앞에선 무엇이든 용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 시인은 「행주치마반란」에서 거품을 내며 저녁 7시를 닦는 여자를 소금기 없는 여자로 본 것이다.
알았다, 내 의식의 하루가 담쟁이처럼 빙벽을 오르는 시간
돌부처가 웃는다
-「행주치마반란」 일부
위의 예시된 싯귀절을 살펴보면 시인은 “4월이 실종된 것도 모른 채, 나는 저녁 나팔꽃도 닦는” 소금기 없는 여자인 자신에게 던진 조소 섞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면서 오직 전업주부로서 살아온 밋밋한 자신에 대한 꾸짖음과 독자들에게 이런 정서로부터 벗어나라는 일침의 주는 매우 냉소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시의 구조는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시의 구조를 가진 시가 결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순성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따라서 이런 시적 장치들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봄비가 재잘재잘 내리는 어느 날,
잔득 배부른 그가 홍제동 경강로 2가에 앉아있다
······〈중략〉······
누가 탈탈 털어 먹었다 폐가였다 내 정신의
신경이 끊어지고 있었다
-「큰항아리」 일부
시적화자는 “그의 허리둘레는 이미 줄자의 눈금을 이탈한다. 뷔페식당에서 폭식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뭉게구름 두 어 뭉치를 집어 삼키고 비대해진 복부, 전자저울에 그가 올라서면 바늘이 두 바퀴나 훼~엑 돌 것만 같다”고 매우 부정적으로 「큰항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헌 양심을 팔아 ‘한우’ 한 마리를 사먹었나”라며 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일시에 무너지게 하는 것이 시간이다. 시적화자가 ‘큰항아리’에 대해 생각했던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경계가 되는 시점이 ‘지천명’이다. 이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의 뜻을 앎’이라는 의미다. 즉 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로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지천명에 이르러서 “내 정신의 신경이 끊어”질 정도로 저 항아리를 “누가 탈탈 털어 먹었다”던 것이다.
정계원 시인의 「큰항아리」가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하는 묘미는 반전(국면전환)에 있다. 2연에서 그토록 비판하던 시적 대상을 ‘지천명’이라는 시간을 불러와 대반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극적인 효과(dramatic effect)를 가져다주는 시적 장치의 하나다. 다시 말해서 모순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입장, 목적의 ‘역전’, 그리고 가치기준의 ‘전환’ 으로 수속(収束)되어 가는 것이다. 큰항아리에 대해 거세게 비판적이던 화자(persona)는 지천명이 되어서 급격한 긍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따라서 ‘지천명’은 시간의 개념이며, 이 시간은 화자의 정신적 성장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반전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그는 그냥 붉어질 리가 없어 가슴에 낮달 서너 개가 슬픔으로 박혀있어 이마엔, 검은 장마전선이 드리워있고 성황당의 소나무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가득해, 손바닥에 비문을 세우는 날도, 눈물로 어둠을 닦는 날도,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상을 서너 번 외면하는 날도 있었어
-「계백로 16번길 홍시」 일부
시는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명적이 여서는 안 된다. 시작(詩作)에서 설명을 배제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대상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이다. 김용직은 그의 저서 『문예비평용어사전』(1989)에서 “이미지(image)는 미지의 것을 순간적으로 선명히 파악하게 해 주는, 즉 지각을 용이하게 해 주는 수단”이라고 했다. 물론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이미지에 대해 여러 시적 테크닉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 역할이란 대구법, 직유법, 반복법, 대칭법, 과장법 따위의 여타 수사적 장치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지화는 아직도 여전히 시적 장치로써 널리 사용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이미지는 시적 테크닉으로써 시 창작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미지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가리키며 주로 시각적인 것을 말하지만 시각 이외의 감각적 심상도 이미지라고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어느 대상, 특히 사람의 외적 형태의 인조적 모방 또는 재현"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인간들을 움직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논리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단지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말 대신에 '이마골로기(imagologie)'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점에 대해 정계원 시인에게도 결코 예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앞의 「계백로 16번길 홍시」에서 ‘홍시’는 시적화자와 특수 관계자이다. 이 ‘홍시’의 정서를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낮달’, ‘장마전선’, ‘비문’, ‘눈물’, ‘손금’, ‘독촉장’과 같은 것은 모두 시각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계백로 16번길 홍시」는 이미저리(imagery)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화자(話者)의 내면에 떠오른 대상에 대한 감각적 영상을 언어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앞에 예시를 든 시작품뿐만 아니라 10편의 시에서 이미지화의 시적장치들이 유독 눈에 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계원 시인은 일상에서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낯설게 하기’를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내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미학적 가치를 느끼게 한다. 독일의 연극 연출가이자 시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B. Brecht)도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예술이 심미주의로 흐르거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실천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이론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듯이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은 현대시가 추구하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통용되고 있으며, 이런 흐름에 정계원 시인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이미지화의 작업은 특히 무의식 속에 습관화된 이데올로기나 매일 보는 일상적인 대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목을 환기시키고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준다.
다음의 작품에서 정계원 시인의 실험적인 사유가 나타나는 시작품을 만나게 된다. 앞서 말했던 일상 속에 감춰진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시어들의 배치나 연을 배치하는 형식이 아방가르드의 경향을 그는 보이고 있다.
균형잡힌 식단이라고 했어
⤷살짝 데친 증오 무침 10g이야
⤷참사랑 한 근 두고 가기로 했어
⤷포장배달 가능한 민주주의 1리터야
⤷정제된 분노만 사용해
쭈
우
욱
쭉, 하지만
-「나쁜식당」 후반부
이 「나쁜식당」은 소주제를 내걸고 그 소주제에 대해 결론을 상세화 하는 방법을 반복한다. 그 방법은 댓글달기 형식으로 이미지를 제시하며, 그 대상의 이미지화는 병렬적이다. 댓글형식으로 제시된 각각의 이미지들이 상호텍스트성을 지닌 것 같지는 않지만 따지고 보면 ‘무관계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선시(禪詩)에서는 반상합도(反相合道)로 설명된다. 가령 ‘균형잡힌 식단’이 ‘살짝 데친 증오 무침 10g’, ‘참사랑 한 근’, ‘포장배달 가능한 민주주의 1리터’, ‘정제된 분노’와 같은 각각의 비유는 시작(始作)에서 동일함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종말에서는 서로 동일한 의미로 비유된 은유이라는 점이다. 한편, 이 시점에서 굳이 「나쁜식당」이 지니고 있는 시적 경향을 말해본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깝다. 이 시에서 정계원 시인은 지속적으로 미끄러짐과 횡단을 반복하는 사유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주치마반란」과 「계백로 16번길 홍시」는 중심주의가 바탕을 이루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작품이다. 두 작품의 사유에서 노마드적 사유가 아니라 정주(定住)하는 사유로써 표층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뿐이다. 반면에 「나쁜식당」은 「행주치마반란」과 「계백로 16번길 홍시」와 서로 상반된 경향의 사유를 드러낸 시이다.
정계원 시인이 「나쁜식당」에서 보여준 아래의 표현은 그의 시작(詩作) 스타일을 잘 대변해 주는 부분이며,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늘 추구하는 시정신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실험적인 시작(詩作)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매우 노력적이다.
쭈
우
욱
쭉, 하지만
의 부분은 청각을 시각화 하는데 성공한 ‘낯설게 하기’의 일종이다. 하나의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이시켜 복합적인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즉 청각이라는 한 가지 감각만을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청각의 시각화라는 두 가지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공감각적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서 청각적 이미지가 시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감각의 전이(轉移)를 일으키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통사규칙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규칙의 파괴는 해체를 말하는 것이고, 해체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construction)의 시도이다. 이런 사유는 시인의 다원주의의 표방이며, 가치평등의 주장이다. 그래서 정계원 시인의 사유는 수목적 사유가 아니라 대칭적 사유로 상호호혜의 시정신이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놓고 정계원 시인은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킨다는 표현이 더 옳은 듯하다. 다음의 시에서도 같은 느낌의 시적태도를 보여준다.
뼈를 발라내기 시작한다
캔, 맥주
오렌지
봄, 한 조각마저
그의 갈비뼈 하나 둘 잘려 나가는
오후 2시
선지피, 한 모금
봉봉
사과즙
암사자가
꽃사슴의 푸른 영혼을 발라먹듯
-「자동판매기」 일부
예시된 「자동판매기」에서 ‘자동판매기’와 ‘직립의 맹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동판매기’는 교환가치의 품고 있는 자본주의이며, ‘직립의 맹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우리들이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자동판매기」를 앞세워 교환가치의 모순과 그 제도에 순종하는 우리들의 의식에 대해 비판한다. 욕망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은 ‘직립의 맹수’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뼈를 발라내기 시작한다.’ 뼈가 발라진 ‘캔, 맥주/오렌지/봄, 한 조각마저/······〈중략〉······/봉봉/사과즙/암사자가/꽃사슴의 푸른 영혼을 발라먹듯’이 먹어치운다.
교환의 편리를 위해 생겨난 화폐는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로 모든 생산품에 가격을 매기는 바로미터다. 잉여 생산물들이 화폐로 상환되면서 부(富)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즉 교환되고 소비되던 가치가 저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축척을 위해 일단 생산하고 보는 것이 자본주의 세계이다. 사용자가 제품을 구입하고, 그 제품의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교환가치는 교환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의 축적만 가져오면 된다. 이를테면 한 병의 물을 구입한 소비자가 그 물을 먹든지 말든지 교환가치는 이익만 얻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엔 소유의 만족은 가격이 대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좋기 때문에 비싼 것이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다.
정계원 시인은 시장경제에서 부의 축적을 위해 가해지는 교환가치의 모순에 대해 「자동판매기」를 앞세워 비판하고 있다. ‘그의 무릎 밑에/직립의 맹수들이 일렬로 서 있다’는 구절에서 직립의 맹수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필요한 만큼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많은 제품을 생산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이것은 기업의 윤리관을 저버린 가치관이다. 이익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우려를 염려한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의 시적 소재는 이처럼 경제적인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려되는 이 사회의 모습을 마지막 부분에서 ‘하이에나들의 식사/우주가 쨍, 금이 가는 소리’로 결말을 짓는다.
짧은 앞발로 지하 방을 안고 있는
우린 피그미 토끼
아무도 보지 않는 세상에 제일 작은
피그미 토끼 한 아이가
5번 출구로 나가고 있네요
-「피그미 토끼」 전반부
열린 사유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상상력은 새로운 것, 또는 경이로운 것을 창조하는 근원적 요소로써 시작(詩作)에서 매우 중요하다. 칸트에 따르면 상상력은 "대상을 그 현전이 없어도 직관 속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며, 또는 “다양을 하나의 형상(Bild)에로 가져오는 능력”이다. 또 콜리지(Coleridge, S. T.)에 의하면 상상력이란 이성을 감각적인 심상(心像)과 합체시키는 능력으로서 이념화하고 통일화하려는 노력이다.
결론적으로 상상력이란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체험들이 자발적으로 이념화되고 실재화하여 청신감과 경이감을 유발하거나 인류 문명·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능력인 것이다. 동시에 지성의 창조적인 능력. 정서와 지성, 때로는 감각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체험(體驗)적 요소들을 종합하고 조직해서 새로운 초월적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계원 시인의 「피그미 토끼」는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이 토끼(Brachylagus idahoensis)는 미국 서부에 분포하는 것으로 몸길이 23.5~29.5cm, 몸무게 375~500g에 불과하다. 실제 시적 대상은 실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시인은 이것을 통해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낯선 사물로 안내한다. 그는 “피그미 토끼 한 아이가/5번 출구로 나가고 있”다고 현실을 초월한 상상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 ‘피그미토끼’는 곧 시적화자이다. 현대시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피그미 토끼」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화자(話者)와 시인이 동일성을 띠고 있다. 시에 사용된 시어를 분석해 보자. “김춘수 시인의 ①비가 시집을 읽어요/CC카메라에 ②비가 잡히네요.”에서 전자의 ①‘비가(悲歌)’와 후자의 ②‘비가(rain)’는 발음상으로는 동일한 형식을 가지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언어유희(pun)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5번 출구’, ‘전동차’, ‘자켓’, ‘CC카메라’, ‘체크카드’, ‘리본’과 같은 것은 분명히 모더니티적인 어휘임엔 틀림없다. 따라서 「피그미 토끼」는 성격상 모더니즘의 시라고 말할 수 있으며, 현대시는 화자와 시인을 별개의 것으로 본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그미 토끼」는 동일성을 보이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낯설게 하기’의 일종으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정계원 시인은 「피그미 토끼」에서 일차적으로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정의를 내린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고정화, 고착화의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는 개성적인 시 정신을 드러낸다.
Ⅲ. 반성의 이중적 구조
시 창작에서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 중에 하나가 한 주제를 가지고 이중적 구조로 끌고 가는 작업이다.
전파를 탐지하지 못하는 귓불, 생의 폐달을 밟다가 부러진 발목, 그는 치맛자락에 허무가 점점이 박혀있어, 꽃고무신 속에 일원짜리 동전들이 꼼지락거려, 눈동자 속엔 봄이 빠져나가고, 젖무덤엔 무궁화 꽃이 시들어 버린지 오래야 그의 옷소매엔 소금꽃이 낭자해, 석양이 지고 있어 내 슬픔의 덩어리들이 석양빛으로 그의 수의를 짜고 있어
-「악어소파」 일부
하이데거식의 반성은 사유에 대한 사유의 반성이다. 전자가 ‘존재를 정립으로 규정하는’ 사유라면, 후자는 ‘전자에 대한 반성적 사유’다. 사유는 감각적 다양을 종합 통일함으로써 객관으로 설정한다. 동시에 자신의 인식능력을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객관으로 설정되어 있음’이 자신의 인식능력과 맺는 관계를 조망한다. 그럼으로써 반성 관계에 입각하여 존재양상의 개념을 규정한다. 따라서 필자는 정계원 시인의 「악어소파」에서 반성의 이중적 구조를 목도한다.
사유는 사유가 사유 그 자체를 반성하기 이전 이미 반성이다. '사유에 대한 사유'를 우리가 반성이라 부를 때, 이런 의미의 반성은 실질적으로는 '반성에 대한 반성'이다. 반성에 대한 반성은 사유가 이미 반성임을 밝혀냄으로써 독자를 사유의 근원적 의미에로 안내한다. 「악어소파」에서 ‘악어’는 상징적인 시어로 작용한다. 즉 ‘악어는 노모’라는 등가를 성립시킨다. 그래서 이 시는 반성과 반성을 거듭하는 시이다. 좀 더 가까이 살펴보면 포식주의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악어’는 본래적 포식주의자 아니다. 악어는 ”내 빈곤의 울음소리 달래던/한 권의 손자병법”이 되기 위해 서슬 퍼런 포식주의자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치맛자락에 허무가 점점이 박혀 있’고 ‘봄이 빠져나’간 눈동자와 ‘무궁화 꽃이 시들어버린 지 오래’된 젖무덤을 가진 악어다.
반성하지 않는 사유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시적 사유라고 할 수 없다. 시인이 먼저 반성할 때 독자들은 따라 반성한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정계원 시인은 악어라는 존재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시도한다. 이것은 훗날 자신이 “강릉시 용지로 19번지에 앉은뱅이/악어가 앉아 있”을 것에 대비하는 자기 정체성의 탐색과정이다. 시인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때 자신이 악어의 악어에 대한 손자병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행동양식을 “내 슬픔의 덩어리들이 석양빛으로 그의 수의를 짜”며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다.
반성적 이중구조는 시인의 진실이 담보될 것을 요구한다. 자칫 진실을 위장한 반성은 독자로 하여금 외면 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생의 과거형으로부터 생의 현재형에 이르는 자기성찰을 ‘악어소파’를 통해 수행하고 있다. “강릉시 용지로 19번지에 앉은뱅이 /악어가 앉아 있”는 것은 미래의 시인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귓밥에서 보청기가 빠져나”가는 것과 “그믐달처럼 휘어진 등뼈”가 현재의 악어가 아닌 미래의 자신임을 반성적 이중구조를 활용하여 독자들에게 울림을 제공하고 있다.
눈이 충혈 된 석양을 집어 삼키는 빈 저녁이야
하얀 고독이 켜켜이 앉아있는 의자니
접시가 숭배하는 빵이니
내 몸을 기억하는 브래지어니
아니야
무수한 업을 올려놓아도 가라앉지 않는
경포 앞바다 십리바위야
-「누드」 일부
이미지는 직접적 신체적 지각이나 간접적 신체적 지각에 의해 일어난 감각이 마음속에 재생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형상(刑象)이다. 이 형상은 감각적·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상(象)이며, 예술의 기초이다. 나아가 의도적으로 미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이다. 예시는 정계원 시인이 『시사사』 2015. 9~10월 격월지에 발표했던 「누드」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누드를 “눈이 충혈 된 석양을 집어 삼키는 빈 저녁이야/하얀 고독이 켜켜이 앉아있는 의자니/접시가 숭배하는 빵이니/내 몸을 기억하는 브래지어니”라는 명제에 대해 “아니야”라는 말로 부정을 하고, 다시 “무수한 업을 올려놓아도 가라앉지 않는/경포 앞바다 십리바위”로 은유하고 있다. “아닐 거야” “두 손 묶인 수족관 숭어야”로 또 다른 합명제를 제시한다.
이것은 대화술의 하나로써 변증법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정계원 시인은 정명제와 반명제를 사용하여 모순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합명제를 찾거나 최소한 대화가 지향하는 방향의 질적 변화를 일구어내는 논법을 사용하고 있다. 정계원 시인은 동일률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대립 또는 모순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쯤에서 정계원 시인이 다양한 시 창작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아와 세계를 동일한 가치로 받아들인다. 곧 ‘나=누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나’=‘누드’라는 동일성 증명을 변증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정계원 시인의 시정신은 자아와 세계가 상호 동화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아와 세계 사이에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시 시인의 내부에 있는 모순에 의해 대립을 낳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이처럼 정계원 시인의 변증법적 접근의 목표는 이견을 합리적인 토론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시인 자신이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는 ‘즉자(卽自, an sich)’의 단계에서 이미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모순이 노정된 단계로 볼 수 있다.
정계원 시인은 시에 대해서 남다른 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 연민의 상태를 다음의 시에서 알 수 있다.
펜 끝에서 너를 잊으려고 해, 나를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은 동굴로 만들었어
원고지에 주저 앉아
석고상처럼 토막잠에 빠지기도 했어
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너는
무섭게 달아났어
내 몸속으로 너가 내리는 오후
나의 떨림을 봐
긴 목의 토르소, 나는
앙칼진 손톱으로 내 울음을 원고지에
새기고 있어
-「100.2℃의 시」 일부
정계원 시인이 정의하는 시의 의미는 100.2℃다. 시에 대한 지고지순한 마음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는 시를 사랑하고, 혹은 시를 숭배할 만큼 생의 일부로 생각하기에 “어디에 숨어 있니/설원의 원고지 한 귀퉁이를/걸으며 또 한밤을 꺾”고 있다. 그는 너무나 시를 사랑하여 “펜 끝에서 너를 잊으려고”하고, 시는 “나를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은 동굴로 만들”기도 했으며, “원고지에 주저앉아/석고상처럼 토막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이 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너는 무섭게 달아나기도 했다. 그럴수록 정계원 시인은 “앙칼진 손톱으로 내 울음을 원고지에/새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너를 보며 아우성쳤어” 그러나 “무수한 시간들이 발아래에서 죽어가”고 “어떤 바보가/캄캄한 원고지를 더듬거리며/또 다시 음각하고 있”다.
시인은 모두 ‘바보’다. 한 조각의 빵도 생기지 않는 시 창작을 위해 “너를 보며 아우성”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단순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 시인이 아니라 단 한 줄이라도 ‘완성’된 시를 원하며, 이것으로써 바삐 사는 현대인들에게 혜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정계원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100.2℃의 뜨거운 치열성을 보여주고 있다.
Ⅳ. 에필로그epilogue
정계원 시인의 시 10편을 두서없이 살펴보았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시를 통해 인간의 이미지를 규정하려고 했다. 무려 10편중에 7편이 이에 해당된다. 가령 「샤갈연가」= ‘나의 자화상’, 「행주치마반란」=‘전업주부’, 「큰항아리」=‘부모’, 「홍시」=‘노모’, 「누드」=‘현대인’, 「피그미토끼」=‘자아’, 「악어소파」=‘버림받는 세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7편 모두 시적대상이 동일한 이미지로 반복하지는 않았다. 각각 다른 방식과 내용의 주제를 드러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원인은 근면성이라는 요소가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을 낳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시의 완성도를 요구하는 시의 필요조건은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의 명확성에 달려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시작품 속에 용해시킨 상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시의 종자 얻기’ 다음 단계인 ‘시의 종자 키우기’가 덜된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충분한 ‘시의 종자’를 키운 상태에서 시를 쓸 때 시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시의 종자 키우기’는 충분한 시간과 사유가 필요하다. 섣부른 시의 종자 키우기는 섣부른 시를 양산할 뿐이다.
한 동안 정계원 시인은 시작활동(詩作活動)이 뜸하기도 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의욕적으로 창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매우 꾸준하게 시를 쓰고 있다. 이런 면이 ‘시의 종자 키우기’를 충실하게 만든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로 시인은 습관적으로 시를 써야 한다. 늘 사유하고 발견하고, 그 발견된 세계를 언어로 형상하는 과정을 쉼 없이 반복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즉 습관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셋째, 서두에서 언급했던 시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명제들에 대해 정계원 시인은 그 규정을 준수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시적태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성실성에서 연유한다. 그는 지난해에 10편이상의 신작을 중앙문예지에 발표를 했다. 다작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왕성한 창작활동만은 인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성실한 시적태도의 일면으로 자리 잡게 만든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넷째, 정계원 시인은 소재의 다양성을 통해 시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다. 10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소재는 다양하다. 예를 들면 「샤갈연가」, 「행주치마반란」, 「큰항아리」, 「홍시」, 「누드」, 「피그미토끼」, 「악어소파」, 「나쁜식당」, 「100.2℃의 시」, 「자동판매기」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소재의 다양성을 불러오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부분이 견인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시의 모티브는 개인의 독특한 체험이 그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상상력을 입힐 때 가능해 진다. 정계원 시인의 개인적 체험만을 시의 모티브로 삼을 때 그것은 자칫 신변잡기로 전략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체험 위에 상상력을 가미시킴으로써 시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시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다양하게 전달하고 있다.
현상과 실재에서 실체는 무한하다. 그 무한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해야하는 것, 그것은 오직 상상력만이 유일한 무기이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의 상상력은 소재의 다양성을 불러오고, 또한 무한의 시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때론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첨언하면 익숙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자극과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최대한 거리가 먼 사물을 연결하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다섯째, 설명은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표면(양태)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전제할 때, 정계원 시인은 이미저리로 그 대상을 구체화한다. 다시 말해서 익숙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자극과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최대한 거리가 먼 사물을 연결하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시적장치만이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시인의 길은 결코 꽃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일 수도 있고 성취의 짜릿한 맛을 먹고 사는 길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시는 고통에 성취를 첨가한 맛의 혼합물이다. 이것은 아편과 같다. 그래서 이 혼합물을 마시고 중독된 자를 시인이라고 일컬으며, 그러한 시인은 쉽게 붓을 꺾지 못한다. 따라서 시인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고독하고 비사회적인 존재이다. 시인이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올 여름처럼 유난히 뜨거 워야 한다. 정계원 시인도 그 뜨거운 보다 더 뜨거운 시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기대와 주문을 함께하며 글을 마친다.
-The End
-2016년 월간지 『모던포엠』5월호 게재
<약력>
심은섭
문학박사
`04년 「심상」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 詩부문 당선
`08년 「시와세계」겨울호에 <문학평론> 당선
`06년 제1회「5.18 문학상」 수상
`06년 제1회「정심문학상」수상
`09년 제7회「강원문학 작가상」수상
`13년 제6회「세종문화예술대상」수상
계간「시산맥」편집기획위원
웹진「시인광장」평론편집위원
계간「시와세계」편집기획위원
계간「시현실」편집위원
월간「모던포엠」편집위원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회원
한국비평문학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 카톨릭 문인협회 회원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문학의전당, 2009)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푸른사상사, 2015)
공저 『달빛물결』(The Plus, 2014)
(현)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