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나팔꽃 / 손수진

자크라캉 2010. 8. 26. 13:25

사진<박근혜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 GH2012>님의 카페에서

 

 

팔꽃 / 손수진

 

밤마다 이슬 밟고 다닌다는 소문, 달고 사는 여자를

낮이면 풀이 죽고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는 숫기 없는 그 여자를

어느 별 총총한 밤

숨어서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요

쓰르라미 우는 언덕을 지나

송전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보르르한 콩꽃 같은 신발, 이름 없는 묘 옆에 벗어 놓고

글쎄 송전탑을 기어오르지 않겠어요 말릴 겨를도 없이

차가운 철탑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하마터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끌어내릴 뻔했지 뭐겠어요

그녀는 밤새 철탑을 감고 오르더니

새벽이 되자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세상에, 어디에 그런 뜨거운 것을 숨기고 살았는지

몸에서 환한 꽃을 저 혼자 피우고 있었는데요

햐!

만일 피 뜨거운 사내였으면 어쩔 뻔했겠어요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을 사내도 될 수없는 나는

동트기 전 서둘러 갔던 걸음 되짚어 돌아와

지난밤 일을 함구하고 있는데요

자꾸만 입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지 뭐겠어요

 

 

<출처 : 시집『붉은 여우』, 현대시인선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