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시

꽃이 피는 시간 / 정끝별

자크라캉 2009. 10. 1. 18:52

 

 

 

사진<골뱅이의 영토입니다>님의 카페에서

 

이 피는 시간  / 정끝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


-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
- 시론집 및 평론집『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오룩의 노래』,
- 여행산문집『여운』,『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시선 평론집『시가 말을 걸어요』등
- 소월시문학상 수상
-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