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감상

보물 제527호 단원 김홍도 풍속도첩

자크라캉 2008. 9. 4. 19:16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서호(西湖)·취화사(醉畵士)·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단구(丹邱).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칩거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77년 별제(別提)로 있으면서 강희언(姜熙彦)·김응환(金應換)·신한평(申漢枰)·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그림제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1781년에는 한종유(韓宗裕)·신한평 등과 함께 정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 부터 명(明)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쳤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勸農)을 지내기도 했는데,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1810년경을 전후하여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보물 제 52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단원풍속도첩은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로, 세로 28㎝, 가로 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그림의 제목은 〈서당〉·〈밭갈이〉·〈활쏘기〉·〈씨름〉·〈행상〉·〈무동 舞童〉·〈기와이기〉·〈대장간〉·〈장터길〉·〈시주〉·〈나룻배〉·〈주막〉·〈고수놀이〉·〈빨래터〉·〈우물가〉·〈담배썰기〉·〈자리짜기〉·〈벼타작〉·〈서화감상〉·〈길쌈〉·〈말징박기〉·〈고기잡이〉·〈신행길〉·〈들밥〉·〈노중상봉〉으로 모두 25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과 일상생활의 여러 정경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화면의 배경 묘사를 생략한 채 풍속 자체에 역점을 둔 인물중심으로 다루었으며, 원형 구도와 X자형 구도를 이용한 짜임새있는 구성의 묘로 회화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씨름도〉의 경우 두 무리의 구경꾼들을 화면의 상하단으로 둥글게 배치하여 가운데 공간을 긴장시킨 다음 그곳에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는 2명의 씨름꾼을 그려 넣어 그림의 핵심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정경의 상황을 훨씬 실감나게 표현했다. 옷주름의 필선은 끝이 날카롭게 빠지는 정두묘(釘頭描)를 부분적으로 사용했지만 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무명옷의 질감에 맞추어 다소 투박하면서도 강하고 힘찬 일종의 조핵묘(棗核描)에 가까운 필치를 구사하였다. 이러한 필선은 마치 종이를 구겨놓은 듯 짧고 구불거리도록 방향의 전환을 심하게 주어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기여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둥글넓적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매를 지닌 소박한 모습으로 다루어 조선 후기 서민상의 한 전형을 창출했으며, 이와 함께 당시 일반백성들의 생활정서와 진솔한 삶의 분위기 등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1778년 김홍도가 34세 되던 해 강희언의 집에서 그렸던 〈행려풍속도 行旅風俗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비해 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필치와 묘사력 등도 한층 능숙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져 있어 이 풍속화첩의 그림들은 40세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의 탁월한 기량을 대변하고 있는 이들 그림의 화풍은 김득신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洪善杓 글 - 다음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