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裸木)과 시(詩) /김춘수
사진<산넘고 물건너>님의 블로그에서
나목裸木과 시詩 / 김춘수
1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大地)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겨울의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일진(一陣)의 바람에도 민감(敏感)한 촉수(觸手)를
눈 없고 귀 없는 무변(無邊)으로 뻗으며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2
이름도 없이 나를 여기다 보내 놓고
나에게 언어(言語)를 주신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나님,
제일 위험(危險)한 곳
이 설레이는 가지 위에 나는 있습니다.
무슨 층계(層階)의
여기는 상(上)의 끝입니까,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발뿌리가 떨리는 것입니다.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나님,
안정(安定)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 미묘(微妙)하게 설레이는 의미(意味) 말고는
나에게 안정(安定)은 없는 것입니까,
3
엷은 햇살의
외로운 가지 끝에
언어(言語)는 제만 혼자 남았다.
언어(言語)는 제 손바닥에
많은 것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몸저리는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까,
어떤 것들은 환한 얼굴로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데,
어던 것들은 서운한 몸짓으로
떨어져 간다.
ㅡ 그것들은 꽃일까,
외로운 가지 끝에
혼자 남은 언어는
많은 것들이 두고 간
그 무게의 명암을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까,
이제는 제 손바닥에 느끼는 것이다.
4
새야,
그런 위험한 곳에서도
너는
잠시 자불음에 겨운 눈을 붙인다.
삼월에는 햇살도
네 등덜미에서 졸고 있다.
너희들처럼
시도
잠시 자불음에 겨운 눈을 붙인다.
비몽사몽간에
시는 우리가
한동안 씹어 삼킨 과실들의 산미酸味를
미주美酒로 빚어 영혼을 적신다.
시는 해설이라서
심상의 가장 은은한 가지 끝에
빛나는 금속성의 음향과 같은
음향을 들으며
잠시 자불음에 겨운 눈을 붙인다
출처:「소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