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두 개의 꽃잎 / 김춘수

자크라캉 2008. 8. 26. 19:56

 

사진<꽃향기 많은 집>님의 카페에서

 

개의 꽃잎   김춘수


해 질 무렵은
긴 회랑(廻廊)의 끝 아이들 발자국처럼
봄의 뜨락처럼
소리없이 술렁이는
죽음 이쪽의 저무는 산허리,
늑골(肋骨)의 초록 비늘,
어제 죽고 내일 죽고
해 질 무렵은
오늘 하루 저무는 꽃잎의
그 아련함.

   *

세브린느,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네 샅은 열린다.
비가 내리고
비는 꽃잎을 적신다.
꽃잎은 시들지 않고 더욱 꽃 핀다.
―이건 사랑과는 달라요.
세브린느,
네 추억은 너를 보지 못한다.
세브린느 세브린느,
부르는 소리 등 뒤로 흘리며
오후 다섯 시
네 샅은 시들고
사랑을 찾아
너는 비 개인 거리에 선다.

   *

너 보고 싶은 마음
안개 속에 있고 진흙 속에 있다.
희멀건 하늘에 있고
연못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
세브린느,
너 꽃잎으로 피었다 지면서
바람 부는 날 코피 쏟고
눈 감으면 또 아침과 만난다.
눈이 눈을 덮고 겨자씨를 덮는
그런 겨울 밤에
나는 죽는 꿈을 꾸었지만
죽음은 없고, 없는 것이 너무 좋아
갈잎에 듣는 이슬방울을
세브린느,
나는 그만 꿈에서 보고 만다.


출처 :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