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2007 시안 신인상 당선작 / 미로 찾기 - 박기동]

자크라캉 2008. 2. 12. 09:50

 

사진<소찰퐁이>님의 블로그에서

 

[2007 시안 신인상 당선작]

 

로 찾기 / 기동

 

벽이 운다 오늘도 붓을 놓지 않는 그는

벽에 풀칠하는 대가로 입에 풀칠을 한다

울음의 발원지는 대부분 손 닿지 않는 내부

입막음은 쉽지 않으므로 풀칠은 어루만지듯 조심스럽다

벽 너머로 이따금 햇빛이 기웃거리곤 해도

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조용하게 벽을 가로막고 풀칠을 하는 것인데

대부분 직접 본 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았다

가끔씩 벽에 부딪힌다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거지만

벽은 불가피하다 울음은 잘 옮는 탓이다

전화기를 자주 울리거나

풀 자국이 벽지문양의 패턴처럼 그려진 등을

적시거나 이지만

잠깐 들은 것이므로 자세한 건 아니다

곰팡이를 피우기도 하는 그 축축한 전염성은

늦은 저녁 식탁을 짭짤하게 치장할 것이라고도 했다

 

길어진 벽에 길어지는 면벽의 시간이다

습기를 머금어서일지 울음은 힘이 세다

콘크리트 벽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대부분 울음에 약한 반면 붓은

달래듯 그와 벽 사이에 끼어 부드럽게 침묵을 완성했던 것

조용한 날들 이어졌고 그 중에

잠시 동네가 시끄러웠고

벽을 넘은 것은 얼룩 고양이였는데

벽은 침묵했고 우는 건 그 도둑고양이뿐이었다

비슷한 무늬들이 많아 단정지을 수는 없었고

거의 벽에 가까웠으므로

알고 있을 것 같았던 그는

여전히 만나기 힘들었고

어쩌다 우연히 그의 등을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벽의 외부로 빠져나가자 또 다른 벽의 내부

 

 

질긴 독서 / 박기동

 

돛을 올린다, 펄럭!

넘어가는 책장 속에선 가끔씩 고래가 출몰했다

말끝마다 출렁이는 문구에 빠져드는 사내

대서양을 넘긴다 인도양을 넘긴다

작살처럼 빛나는 시선,

휴지부 하나 놓치지 않는다

밤을 넘긴다 때를 넘긴다

그는 계속 뒤쪽으로 간다

매일처럼 대박의 꿈을 펼치는 해역

아직 고래가 멸종되었다는 구절이 없다

고래도 사내도 떠오르지 않는 바다

그리 두껍진 않다

문득

태평양을 넘기다 끊어진 문장

오대양 횟집 파라솔 그늘을 지나

몇몇의 시간들이 멈춰있는 금은방, 보물섬 건너

난파된 <바다이야기>가 간판을 내린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 에이허브,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에 있기 때문이리라

파란의 문구를 수식하던 만장의 바다,

마침표가 없다

한 해를 넘긴다 집을 넘긴다

여전히 물결치는 현수막, 펄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