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

內容이냐 表現이냐 /姜 錫 浩

자크라캉 2007. 7. 2. 17:22

수필작법13.

 

容이냐 表現이냐  / 姜 錫 浩


수필의 작법을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詩·소설·희곡 등 다른 문학 작품을 쓰는 데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수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수필은 어느 문학 양식보다도 광범하고 다양하고 자유스런 창작이기 때문에 작법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수필문학을 지망하는 젊은 학도들에게는 그 작자 나름대로의 작품제작 습관이나 특징 같은 것을 밝혀 줌으로써 수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창작 의욕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은 수필이란 무엇인가? 그 작가가 규정짓는 수필의 정의나 시점에 따라 그 방향과 방법 내용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수필은 한 마디로 말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나의 경우 수필은 서정시적 정서나 감흥을 가지면서도 詩가 아니고, 소설적 구성을 가지되 소설이 아니며, 戲曲的 비평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희곡도 비평도 아닌 자유스러운 창작문학의 한 형태라 정의하고 싶다. 또 그 내용은 아름다운 詩가 있고, 날카로운 풍자가 있고, 가벼운 유머가 있어야 하며, 때로는 따끔한 비평과 진솔한 자기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수필을 한 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다만 이런 전제를 두고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 지향하고 있는 몇 가지 노력 점을 든다면,

첫째 나는 주제 같은 것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흔히들 수필도 소설처럼 처음부터 주제설정이 어떻고 중심사상이 어떻고 들 하는데 이런 것은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설교조의 수필이 되거나 논설 같은 경수필 아니면 인생론 적 철학얘기가 되기 쉽다.

그저 일상생활의 사사로움 속에서 좋은 소재를 발견하여 거기다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주제 같은 것은 저절로 그 밑바닥에 흐르기 마련이다. 무슨 상이 떠올라 붓을 들었으니 그 상에는 주제와 소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내용보다는 표현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좋은 수필이란 재미있는 내용이냐, 문장의 아름다운 표현이냐를 두고 논쟁을 자주 벌인다.

그 결론은 내용도 좋아야 하고 표현도 좋아야 한다는 양자 접합으로 몰고 가는 것이 무난하지만 나는 문학이 말과 글을 통한 표현의 예술이라면 표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분다. 문장이나 표현에 중점을 두지 않는 수필은 이야기로 흐르기 쉽고 내용에만 치중하다 보면 소설의 흉내가 되기 쉽다.

어떤 수필들을 보면 지나치게 내용 중심의 흥미를 추구한 나머지 천재일우의 희귀하고 신기한 순간적 사건을 포착, 그것을 소개하기에만 급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크게 지탄을 받고 있는 수필의 문학성내지 예술성의 결핍을 빚게 되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나는 지나친 인생의 긍정이나 옛 추억의 되 뇌임을 피하고 있다. 인생을 지나치게 긍정하다 보면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의 희박으로 따끔하거나 새콤한 맛이 없으며 지나치게 지난날을 아름답게 회상하다 보면 현실 부정·도피의 복고적 낡은 글이 되기 쉬우며 지나치게 자기 가정이나 직장의 소재만 다루다 보면 여간한 재능이 없이는 팔불출에 빠지기 쉽다.

자연과 세상사의 흐름에 편승하여 긍정 일변도로 흘러만 갈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느낌과는 달리 반대의 의미를 추구해 보는 것, 그런 것이 이른바 문학 정신이 아닌가 한다.

문학을 神과 자연 그리고 물질로부터 인간을 회복하고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볼 때 수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흔히들 수필은 생활의 앙금이니 수필을 쓰기 전에 생활이 수필 화돼야 한다느니, 수필은 40 대 이후의 문학이나 이런류는 깊이나 무게는 있을지 몰라도 참신함은 찾기 힘들다.

수필은 비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하고 보다 혁신적이며 생동적으로 시도하고 싶다.

천재작가 이상은 허약한 체구와 애인 등에 업혀 사는 비참한 처지였지만 이상한 콧수염을 달고 철 지난 누더기 옷을 입고 나와 세상을 냉소함으로써 자기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 문학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수필이 詩的 산문이요, 산문적 詩 라면 詩에서의 이미지와 리듬, 서정성이 있어야 하고 산문에서의 묘사력과 구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그 속에 촉촉이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서정성이 없다면 논설이나 논문을 읽는 기분이 될 수 밖에 없고 언어의 표현과 구성이 서툴면 문학이전일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수필 작가는 詩人 이나 소설가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표현법을 더 배워야 한다.

특히 구성의 경우 대개 연역적으로 차근차근 전개해 가는 경향이나 귀납적 대화체의 삽입 등 입체적 전개는 한결 내용을 다이내믹하고 생기롭게 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수필에 있어서 지나친 논리나 합리성의 추구는 금물이다. 잘 짜여진 직면보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듯 유보하여 독자에게 생각할 여백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잘 짜여진 논리나 합리성은 독자로 하여금 공감보다 거부반응을 느끼게 하기 쉽다.

이상의 지적은 오히려 나의 수필작법 이라기보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수필논 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나의 수필 제작 습관에 관하여 몇 가지 적는다면.

나는 수필을 청탁받으면 큰 고민에 빠진다. 무엇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 한참 고민을 하다 보면 번득 수필이 될만한 상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면 그 想을 쫓아 그와 연관된 일을 집중적으로 더듬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변소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면서도 계속 며칠간 그에 대한 생각만을 쫓아 헤매다 보면 다시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가 온다.

그러면 그것을 잊어 버린다. 유달리 망각성이 강해서인지 계속 생각을 않으면 곧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잊어버린 想이 며칠 후 다시 떠오른다.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붓을 든다.

붓을 들었다. 하면 단숨에 써 내려간다. 직업이 매일같이 논설이나 기사를 쓰다보니 단숨에 써 나가지만 그 대신 자칫하면 논설이나 기사 투가 되기 쉬워 이에 대한 주의를 각별히 기울이지 않을 수없다. 이것이 나의 결정적인 결점이다.

단숨에 쓴 글은 디시 읽어보지 않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버린다.
서랍 속에서 한 일주일 잠을 재운 다음 좀 한가한 시간이 나면 꺼내어 차근차근 읽으며 퇴를 한다. 퇴고를 하다 보면 언제 내가 이렇게 잘 썼는가, 스스로 감탄이 나오면 성공이다. 그 대신 너무 많은 고침이 나오면 다시 넣어 두었다가 보거나 아니면 미련 없이 찢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