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의 序頭考 /吳 蒼 瀷
수필작법11
隨筆의 序頭考 /吳 蒼 瀷
冐頭, 虛頭라고도 일컫는 序頭의 語意는 대개 발단(opening),시작( beginning )의 개념으로 통한다. 그러나 비교적 단문의 형식인 수필에 있어서 서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승 전 결의 첫 머리에 해당하는 順次的 地位 이상의 격을 갖는다.
그것은, 육상경기의 출발점과 같은 것이 글의 서두이고 보면, 단거리 경주에 해당하는 수필에 있어서의 출발점은 그 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신호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수필에 있어서의 서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첫 인상' 이요, 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日氣豫報'와 같은 것이다. 예보란 전개될 諸事象의 맥을 중앙 집결 시킴으로써 가 능한 類堆作用이다. 글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단문이든 장문이든 서두는 논고의 내용을 귀납적으로 집약시킨 예지적 존재다.
일기예보가 빗나갔을 때의 실망과 허탈감은 글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뒷맛은 역시 불쾌할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와 수필가들은 줄 첫 머리의 단 한 줄을 끌어내기 위해 피나는 산고의 아픔을 겪는다.
수필가 韓黑鷗같은 이는 수필 한 편을 쓰는데 5년(나무), 3년(보리)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제목을 정해놓고, 대상을 예의 관찰하는데 그리 많은 세월을 요했지만, 환언하면 그것은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되는가에 그리도 긴 시간이 소요됐다는 간접적인 시사 이기도 하다
찢고 지우고 다시 쓰고......, 5년만에야 그는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라는 서두를 건져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나무> 의 서두는 또한 그 수필의 결구이기도 하다.
이처럼 수필의 문장은 주제를 서두에 강조하는 두괄 형과 중간과 말미를 일반화하는 중괄, 미괄 형이 있어 일반 문장구성법에 준하여 말할 수 있다.
즉 順次式 또는 단순구성에서는 대개 완만하거나 겸손한 서술체 의 문장으로 출발하여 말미에 가서 그 주제의 핵을 일반화하는 것 이 보통이다. 그러나 문장을 시간적 순서나 공간적 순서를 밟지 않고 서술하는 병열씩, 나열씩 구성법을 취하는 작자는 글의 서두에 매우 예민한 신경을 쓰게 된다.
즉 직유 아니면 은유의 문장으로 거의가 머리 부분에 주제의 핵을 장치하는 두괄 형의 구성법을 택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金泰吉의 수필<낙엽>이나 아양하의<글>을 들 수 있다. 서두는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서술체의 문장이다.*낙엽이다*로 시작한다. 그러나 말미에 가서는* -그것이 조락이요, 죽음인 것이다.* 라고 주제를 운치 있게 강조하고 있다.
또<글>에서는 *글을 쓴지 오래다.* 라는 차분하고도 겸허한 서두로 출발하여 *......,만일 내게 애인이 있어 이 글을 재미나게 읽었노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온 세상을 얻을 것 같은 것은 여기 다시 두 말할 것도 없다.* 라고 말미에 주제를 농축시키고 있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金珖燮의<隨筆文學小考>와 韓黑鷗의<나무>같은 수필을 들 수 있다. 감광섭의 경우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라고 다소 애매하지만 분해나 재조립이 불가능한 정의를 서두에서 강조한다.
또 한 흑구의 <나무> 에서도 전편을 통하여 무려 열 번이나 똑 같은 문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라는 한 줄을 서두에 앞세운다. 5년이란 긴 세월의 각고 끝에 쓰였다는 이 수필의 어느 문절에도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라는 말이 들어 있다. 글의 어느 부분을 전도시켜 앞세운다 해도 결국 이 수필의 서두는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라는 제자리 걸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한 장소에 맞은 말은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는 프로 벨의 명언대로, 이 수필이야 말로 단 하나밖에 없는 서두를 제대로 발견한 샘이 된다. *그 수필의 서두는 바로 그 한줄 뿐이다.* 라는 정의가 가당할지는 의문이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또한 서두는 작가가 시도하는 수필의 종류에 따라 그 내용이나 서술의 양상을 달리 한다.
대개, 비평, 철학적 수필의 경우는 제목과 유사하거나 제목이 시사하는 내용의 개념을 담은 문장이 서두를 장식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趙演鉉의<손수건 사상>이란 수필의 첫 머리다. 金泰雲의<가난한 날의 행복> 이란 수필에서도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라고 서두에서 제목이 담고 있는 사고의 흐름을 일단 겸허하게 수용한다.
柳達永<재발견된 한반도>란 수필에서*우리는 어찌해서 이 답답한 골짜기에서 태어났을까요? 참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라고 서두를 제목의 연결된 문장인 듯 친근감 있게 앞세우고 있다. 또한 교훈, 학문적인 수필에서는 명언 명구를 인용하거나 논지의 결론 부분이 서두에 등장한다. 그리하여, 대개는 단조로운 문 장으로 연역법적인 전개를 시도한다.
<인생은 예술처럼>이란 안 병욱 수필의 서두는 *에드워드 카펜터는>'사랑은 하나의 예술이다.' 라고 말했다*로 시작한다. 또 피천득도<巡禮>란 수필에서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라고 첫머리 첫줄을 일반화 함으로써 내용의 핵을 선명하게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신변, 성격, 묘사 등 문학수필에서는 글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이나 감정의 정수를 직설하지 않고, 메타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李恒寧의<더 높은 곳에>란 수필에서는 제목과는 우회하여 [좋은 옷을 입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몇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좋은 옷이나 나쁜 옷이나 별로 구별이 나지 않는다.] 라고 완곡한 문장으로 내용을 은유하고 있다.
李箱도<倦怠>란 수필의 서두에서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라는 문장으로 독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흡인한다. 호기심, 그것은 독자의 연상, 유추작용을 환기시키는 일종의 전이적인 수사법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담화(narrative essay), 서간, 사설수필에서는 대개 대화나 작중인물의 이름이나 특징, 또는 사건의 요체가 표연히 서두에 나타난다. 피천득의 <종달새>란 수필이 그 좋은 예다.
'무슨 새지?' 어떤 초대석에서 한 손님이 물었다. '종달새야' 주인이 대답했다. 동화의 일절을 연상시키는 신선한 대화체의 서두다. 그리고 서정주의 서간수필<아내에게>에서는 [淑이여]란 주인공의 이름이 앞장서며 주정적인 분위기를 농축시키고 있다.
또 사건의 중심 부분이 서두에 표출되는 수필은 김 소운의<두 잔째 커피> 다.
중년부인네 한 분이 다방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신 뒤에 '한 잔 더' 라고 둘째 잔을 청했다. 콩트나 단편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매력 있는 터치다.
대충 수필의 구성이나 조유에 따라 서두의 일반적인 위상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大學國語> 에 실려 있는 30여 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가름한 것이라 예시나 인용, 유추가 일방적이고 불완전하다.
서두와 제재의 연관성, 그리고 말미와의 대칭성 등 서두고의 여지는 아직 많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인상, 예시적인 생리와도 흡사한 것이라면, 결국 수필의 서두는 그 글의 운명을 예시하는 또 하나의 결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필의 소재는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 또는 차창에 스치는 한 잎 떨어지는 낙엽의 빛깔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겠지만, 어찌 좋은 글 좋은 서두를 그리 쉽게 야 얻을 있겠는가.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 단순하면서도 느낌이나 의미 해석 의 여운을 진하게 담고 있는 함축적인 문장이라야 좋은 서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