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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의 여인 1 - 심은섭

만삭의 여인 1 심은섭 어제 밤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절벽에 매달린 한낱 말벌집이거나 사막여우의 발자국인 찍힌 모래언덕쯤으로 알았다 그러나 심해에서 길어 올린 양수로 가득 채워진 후원이 있는 궁궐 한 채였다 컴컴한 밤에도 위조지폐의 표정을 읽어내는 수전노의 감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본적을 잃어버린 높새바람이 살던 둥근 움막집이거나 몰락한 왕조의 능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촘촘히 쌓아올린 산성이었다 양귀비꽃의 가슴에 붉은 허무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얼굴 없는 당목을 섬기는 성황당이거나 카인의 후예들의 갈비뼈를 널어놓은 폐석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천 개의 여신들이 지키는 신전이었다 -2021년 『문예감성』 여름호

나의 자작시 2021.07.20

트로트 1 - 심은섭 시인

트로트 1 심은섭 판자촌굴뚝의 저녁연기처럼 겨우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온 풍각쟁이의 북소리이다 이것이 한낱 여름에 양철지붕을 두드리며 객기를 부리는 소낙비인줄 알았으나 어둠 속에서 달빛이 그려놓은 악보 위에서 달맞이꽃이 몸 푸는 소리였다 시간을 갉아먹은 누에가 은실을 뽑아내듯 가락을 숭배하며 살아온 네 박자이다 이것이 허공의 고막을 찢어낼 것만 같은 금관악기가 세상을 비관하는 유언인줄 알았으나 사내를 징용 보내고 돌아오는 여인의 치맛자락 끄는 소리였다 자정의 어둠보다 깊은 절벽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실폭포이다 이것이 바람이 던진 돌멩이에 도시의 뒷골목 선술집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인줄 알았으나 옥탑방 악사가 반음표의 허기를 끓이는 소리였다 -2021년 〈문학저널〉 봄호 게재 --..

나의 자작시 2021.06.25

붉은 동백의 선언문 - 심은섭

붉은 동백의 선언문 심은섭 눈이 내린다 무릎까지 차오른다 오와 열을 맞춰 서서 추위에 떨고 있는 저들을 한낱 나무로 생각했으나 나무가 아니다 기필코 세 번의 꽃을 피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언 손으로 작성한 붉은 선언문이다 먼 섬나라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도 허공에 꽃을 매달아야 한다는 것과 목을 꺾어, 통째로 땅 위에 떨어져서라도 꽃으로 다시 환생해야 한다는 것과 나의 부패한 정신의 마루에 꽃을 피워주겠다는 맹서이다 한낮에 마른 천둥소리 같은 선혈의 선언문 낭독에 산사를 오르내리던 바람도 고개를 끄덕인다 -출처 : 2021년 『See』 4월호에 발표

나의 자작시 2021.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