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교>님의 플래닛에서
월간 [현대시] 2006. 6월호
책들 / 강해림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는 오후, 북회귀선은
없다 오랫동안 외설로 낙인찍힌, 금서
는 외롭다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수음하는 문장들
껍질을 벗기고 푹푹
삶은 몸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행을 묵묵히 견뎌준 나무들
헌신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해탈한 표정
눈부신 지구상의 책들을 모조리 수거해 종이
비행기를 접어 날려 버린다면
오래 된 책 속에는
시간의 자궁 냄새가 난다 가령, 고서적이나 족보 같은 삭아 한쪽 귀
퉁이가 누렇게 변질되거나 만지면 바스러질 듯, 계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알을 까고 있
는 얼룩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좋겠다 서로 등기대고 앉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심연보다 더
깊은 심연에 낚싯대 하나 달랑 드리워놓고 권태라는 이름의
안경 낀 몽상가들 흉내나
내며 늙어갈 테니까
다시 북회귀선으로 돌아와, 책의
내부에도 지퍼가 있다면 고래뱃속 같은 북회귀선 안
에 갇혀 한 사나흘 캄캄해지고 싶다 캄캄해진다는
것만큼 황홀한 성적 묘사가 있을까
세상의 위대한 책들 앞에선 더더욱,
관념이 짜주는 파리한
즙이 흘린 문장을 따라가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의 고문, 진
리를 살해한 자와 공범이 되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늘 집중력이
문제다
그러고 보니 내 독서목록을 기록하던 만년필도 꽤나 관념적으로 생겼다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여인의 복부처럼,
그리운 북회귀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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