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바다바람>님의 블로그에서
그리운 습격
-천서봉
破片처럼 흩어지네, 사람들
한여름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박히네. 뚝뚝,
머리카락 끝에서 별이 떨어지네.
흰
비둘기 신호탄처럼 날아오르면
지상엔 금새 팬 웅덩이 몇 개 징검다리를 만드네.
철모도 없이, 사내 하나 용감하게 뛰어가네.
대책 없는 市街戰 속엔 총알도 원두막도 그리운 敵도 없네.
마음 골라 디딜 부드러운 폐허뿐이네.
빵 냄새를 길어
올리던 저녁이
불빛 아래 무장해제 되네. 사람들,
거기 일렬의 문장처럼 서서 처형되네.
교과서 깊이 접어 둔 계집애 하나
반듯하게 피었다
지면 사랑아, 모든 첫사랑은
아름다운 패배였을까.
나는 홀로 건너가는 殘兵처럼 남아,
빵집 앞
사거리 침묵이 침묵을 호명하는 낮은 소리 듣네.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네.
소나기의 습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네.
사진<네이버포토앨범>에서
나무에게 묻다
-천서봉
나는 나의 아무것도 나무와 바꿀 생각이 없으나
그가 꿈꾸는 것들을 물어 본 적도 없다.
스님들은 일찍부터 禪房에
들었단다.
지나가던 보살에게 위치를 묻자
낮지 않은 돌담, 속세를 막아서는데
천천히 고개 돌려보니
담장 위로 낯을
내민 대숲이 오히려 나를 보고 있다.
앉았던 돌무지 위를 추스리며 내가 다가가자
대숲은 바람 지는 곳을 가리키며 이내 서걱거리고
사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그저
소소한 웃음만으로 제 주름 누르고 섰을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 이곳에 처음 뿌리
내렸을까.
나뭇잎만큼의 자잘한 햇살 밑으로
세월의 갈피를 펼치고
섬세한 잎맥들의 반흔을 짚어 가면
뒤바뀐 생의
主語들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언젠가 내가 게워내던 순한 연둣빛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국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
하늘에 닿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던 내 오래된 궤도의 연원
위를 까치 한 마리 선 긋고
달아난다.
적요한 오후, 적멸궁에 매달린 물고기가
제법 소금기 가신 투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우리의 모든 길은
어떻게 圓을 그리다 다시 그 자리에 숨쉬게 되는지.
슬쩍 돌아앉는 나무가
둥근 햇무리, 後光
아래로 들고 있었다.
사진<네이버포토캘러리>에서
바람의 목회
-천서봉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 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의 긴 목이 자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가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의 뼈마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集會를 보네.
사진<네이버포포앨범>에서
청동기마상
-천서봉
자주 머리가 무겁다. 11월의 거리는 내게 금지된 약물을 권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플래카드가 아니다. 저
나무와 나무의 귀에 걸려 있는 흰 마스크, 아무래도 좋다. 거리에 관하여 나는 그 일부만을 긍정하므로. 끄덕끄덕 햇살을 털어 제 뿌리를 덮는
나무들, 그러나 한때의 빛나던 은빛은 금방 사라진다. 나의 계통수는 검고 자잘한 그늘의 맛에 익숙하다. 나무는 가끔씩 마른 시위를 당겨 하늘
높이 새들을 쏘아 올리지만 화살 따위는 차라리 관념에 가깝다.
한 연대의 슬픈 계보처럼 풍경은 바람을
거느리고 바람은 속도를 거느리고 죽음을 거느리고 다시 죽음은 죽음의 종복을……, 느릿느릿 구름 거푸집들이 녹슨 풍경을 낳는다. 거리마다 딱딱한
고치들, 바람을 덮고 잠이 든다. 둔부를 들썩거리면서, 움켜 쥔 손아귀의 밤을 당기면서, 세월은 꼭 그만큼의 보폭을 늘려왔을까.
그러나 11월, 거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뾰족한 손가락 끝에 오소소 바람 긁힌다. 말 타는 소리도 없이
나무들은 그리움 자꾸 쏘아 올린다. 무거운 투구를 쓰고 밤은, 텅 빈 家族史의 안쪽을 걸어다닌다.
한꺼번에
발산하는 푸른 새들, 흩어진 家系처럼 어지럽다.
사진<네이버이미지검색>에서
폭설
-천서봉
1.
길이 낮게 들썩인다. 폭설이 시작되자 밤의 나무들은 모두 街燈 아래로
모여든다. 먼 곳의 숲이 어진 나무들을 모아 이름 없는 산이 되고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는 동안 나는 점찍을 수 없는 어떤 나라의 낡은 지도를
펼치곤 하였다. 어머니, 제발 엔카 좀 그만 부르세요. 그립지 않는 것도 가끔은 그리운 밤, 화해나 용서 같은 말에 밑불을 놓고 창 밖으로 혀
내밀면, 닿을 수 없는 공중에서부터 눈발은 거친 둔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튕겨
오르는 白髮, 틈새마다 바람이 푸르르 끓다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만 자려무나.
2.
쉬 붉어진 알등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새 더러워진 문자들을 닦거나 숨 죽여 지도를 그리는 일, 길은 마른
오징어 같았다. 쪼그라든 빨판 같은 어머니 기침 소리에도 기억은 총총 토막 나곤 하였다. 가령, 지면 위로 손바닥 흔드는 낙엽의 고별이나
어머니의 잠 속을 퇴각하는 늙은 군인들의 발자국 따위, 그 위를 덮으며 눈은 가등 아래서 한 번 더 내린다.
고단한 主語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다. 희고 둥근 창 밖으로 밤새 미완의 빛들이 절뚝이며 흘러 다녔다.
무례한 손전등처럼 더듬어보는 아랫목 어머니 모로 누우신 능선 본다 길이, 아득하다.
[심사평]
2005년 『작가세계』신인상의 시 부문에는 8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체적으로
일별할 때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제의식과 시적화법이 표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0년대도 벌써 5년이 지나면서 전통적인 시의 관습과 제도를
탈피하여 당대적 시대정신을 섭수하면서 새로운 시적 감성의 언어를 연마하는 연금술사들이 경향 각지의 도처에 산재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선자들의 분주한 손길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으로는 배두순의 「고로쇠」외 10편, 이인주의「茶山에
기대어」외 10편, 송기영의「실험실에서 보낸 한 철」외 9편, 천서봉의「그리운 습격」 외 9편 등이었다.
배두순의
작품은 매우 싱싱하고 건강한 상상력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특장이 될 수도 있는 이러한 도약적 상상이 시 의식의 내적
심화보다는 오히려 시적 절조와 밀도를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시적 상상의 사다리가 좀 더 참신하고 견고했으면 한다. 이인주의 작품은
시적 호흡이 길고 유장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너무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어투가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한다>는 시적 언어의 속성을 좀 더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송기영의 작품은 매우 감각적이고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특히 시적
대상을 자신의 고유한 시적 어조와 화법으로 견인하여 육화시켜 내는 능력이 수준급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주제의식을 좀 더 깊고 끈덕지게
밀고 나가는 승부근성이 요구된다. 이때 그의 시적 방법론도 더욱 빛날 것이다.
천서봉의 시적 어조와 화법은
명주실처럼 매우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강한 견인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편은 견인의 힘으로 시적 대상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탐사해내고 있다.
「그리운 습격」의 경우 <소나기의 습격>을 묘사하는 언어들이 소나기의 파괴력과 속도감은 물론 <어둠이 빵을 굽고 그리움 외등처럼
부푸>는 뒤안길의 감성의 정황까지도 동시적으로 감각화하고 있는 능력이 매우 높이 평가된다. 이와 같이 시적 대상을 온유하면서도 끈덕진
감성의 언어를 통해 입체적으로 감각화하고, 그 의미를 적요한 시적 울림으로 전하는 능력이 투고 작품 전반에 걸쳐 고르게 드러나고 있다. 천서봉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의 당선을 축하하며 문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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