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만년필 / 송찬호

자크라캉 2006. 5. 13. 12:23
만년필 / 송찬호 | 올해최고의 작품(詩)
2006.05.13

                                 사진<잡동사니>님의 블로그에서

 

 

 

 

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납을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

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룻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

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

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

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

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

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

가 산다

 

2005년 <현대문학> 10월호

2005년 문예지에 발표된 162명의 전문가가 뽑은 2006년 최고의 詩

 

 

 

 

 

 

                                     송찬호 시인

 

1959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장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