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사

`05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나의 기사

자크라캉 2006. 2. 23. 23:38
공모 수상작
나무도마 / 신기섭
2005/12/12 오후 3:43 | 공모 수상작

나무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있게 풀어 내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과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김정환 장대송 함민복





<당선소감>


얼마 전 안과에 갔었다. 왼쪽 눈의 각막이 좀 벗겨졌단다. “당신은 눈물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에 따르면 눈물이 없는 눈은 쉽게 상처가 난다. 안과의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인공눈물을 샀다. 그걸 자주자주 눈 속에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야 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인공눈물을 눈 속으로 떨어뜨렸다. 웃기고 슬펐다. 그것은 정말 꼭 한 편의 희극이었다.
플러그 빠진 냉장고 속의 고깃덩어리처럼, 두고 온 고향의 집이 머리 속에서 썩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가 없는 빈집, 썩는 냄새가 후욱 풍긴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가 당선되는 일이 9급 공무원시험 합격같은 것으로 생각하셨던, 할머니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9급 공무원 감투를 쓴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우습지만 이제, 죄책감에서 아주 약간은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 모교의 존경하는 은사님들, 김혜순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께 큰절을 드린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도 함께 드린다. 곁의 문우들, 우리들의 김점진 조교님, 후배이자 선배이자 친구인 김원, 그리운 시골의 친구들, 서울의 친구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이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 가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