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흰 수건 / 이기인(李起仁)

자크라캉 2010. 3. 3. 19:44

사진<쭈이나라♡>님의 카페에서

 

 

수건 / 이기인(李起仁)

 

헐은 옷소매를 움직이는 그녀에게로 눈시울이 붉은 바람이 온다

그녀 등 뒤로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 송이 파꽃을 피워올리는 시간이 흔들린다

울음을 데리고 온 새 한 마리 어둠이 오는 쪽을 기웃거린다 흙을 튀기며 날아간다

비 오는 날에 새로이 떨어진 돌멩이 밭 한가운데 박혀있다 홀로 상처를 꺼내어 본다

밭 가생이로 올라온 풀들이 촘촘히 우거진 느릅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울고 싶다

흰 수건을 오랫동안 머리에 쓰고 있던 그녀의 호미는 하던 일을 멈춘다

잔글씨들처럼 많은 가지와 잎사귀와 뿌리가 한 호흡을 멈추고서 그녀를 둘러본다

울리지 않는 종소리처럼 아직 걸어나오지 않은 밭 모서리 그늘을 본다

흰 수건을 머리에 감은 그녀는 아름다운 저녁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

 

 

출처 : 2010년 『문학과 사상』, 3월호, p.84.

 

[작가약력]

- 이기인

-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남

-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0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 시집 : 『알쏭달쏭 소녀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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