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침묵의 창세기 / 김백겸

자크라캉 2009. 1. 2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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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님의 카페에서

 

묵의 창세기 / 김백겸 

 
태초에 어두운 뱀의 알 같은 침묵 한 점이 있었다
날개가 돋아나기 전의 검은 붕새인 침묵이 소리를 지르자
침묵의 두 눈이 태양과 달로 변했다
침묵에서 자란 말과 노래가 붕새의 날개깃털처럼 펼쳐지면서
우후죽순으로 삼라만상이 일어났다

침묵이 에덴에서 날개가 달린 뱀으로 변신했다
노래의 딸 이브에게 사과를 던져 에덴의 꿈을 깨뜨리는 법을 가르쳤다
침묵이 에덴에서 머리가 둘인 뱀으로 똬리를 틀었다
말의 아들 아담에게 선과 악으로 에덴을 부수는 힘을 가르쳤다

침묵이 인간에게 말했다

빛이 얼음처럼 식은 꿈 동산에 네가 있음을 아느냐
꿈속에서 너는 금수와 초목의 이름을 짓고 기억과 함께 논다
꿈은 어두운 시간의 호수에서 피어난 연꽃이며
연꽃이 지면 너는 나의 몸으로 돌아온다
너는 시간의 숲에서 생명나무를 돌아보는 뱀의 영혼
너는 갈라지는 바람처럼 태어나고 죽는 뱀 새끼의 몸이다
나는 밤하늘에 꽃밭으로 누운 은하수요
너의 캄캄한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용암이다

침묵은 신화거미가 하늘에 큰 거미줄을 치는 先史를 보았으며
침묵은 불씨를 얻은 말씀인간들이 도시를 세우는 歷史를 보았다
시작이자 끝인 침묵이 꿈 시간에 이빨을 박아 뱀독을 흘려 넣었다
검은 우주의 침묵이 뱀의 알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침묵이 뱀의 도시와 생명을 지배했다


 

 <현대시> 2009년 1월호

[감상]


 매우 재미있는 시다. <성경>의 제1장인 창세기를 소재 삼아 쓴 시인데 오히려 그 상상력은 도가적이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마치 공상 만화를 보는 듯 하고 환상적인 영화 한편을 펼치는 듯싶다.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 즉 여호와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시는 반대로 악마의 어법을 빌려 쓰여지고 있다. 창세의 원력(原力)으로 시인은 침묵을 들고 있고 그 침묵이 흘러가는 길을 시간으로 보고 있다. 태초에 있었던 것은 <어두운 뱀의 알 같은 침묵 한 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침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처음엔 <붕새>로 변신했다가 다음엔 <날개가 달린 뱀>으로 변신한다. 이 뱀이 인간을 조정하여 인간의 역사를 이루게 한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뱀의 범주 안에서만 노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끝내 인간은 <시간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침묵>의 굴레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은 불교적인 윤회사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 시는 불교적 사유에 바탕으로 두고 도가적 상상력으로 쓰여진 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단에도 이런 시가 있다니, 야튼 매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상상력의 반경을 한층 넓혀주는 시라고 본다.

(나태주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