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글자族이 사는 무인도 / 함기석

자크라캉 2008. 11. 2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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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루아치>님의 카페에서

자族이 사는 무인도 / 함기석


폭풍과 풍랑이 휘몰아쳤다
밤은 갈비뼈가 부러졌고 절벽에 배는 난파되었다
돌들이 기침을 하는
이상하고 낯선 해안에 나는 쓰러져 있었다

자정에 눈을 떴다
식인 글자族이 사는 원시 무인도였다
하늘엔 열 두 개의 달이 떠 있었고
전갈 문신을 한 구릿빛 글자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에 낫처럼 생긴 날개가 달려 있었다
사람 뼈로 깎은 창을 들고 있었다

흑인여왕 노바디가 다가왔다
섬의 말인 노씽語로 모두에게 말하자
글자들은 나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마을로 데려갔다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굶주린 글자들이 바비큐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A E I O U 머리가 다섯 달린 늑대가
태양을 뜯어먹고 있었다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불길 위에서 알몸으로 떨었다
불 속에서 무쇠 혓바닥이 달린 태고의 꽃들이 피어났다
마을 앞으로 깎아지른 벼랑이 보였다
벼랑을 기어오르며 글자들이 군사훈련 중이었다

여왕이 다가왔다
내 몸에 올리브기름과 꿀을 바르며 입맛을 다셨다
익어가는 내 엉덩이를 만지며 말했다
조만간 인간의 도시를 습격할 것이다
네가 온 미래로 가는 시간의 뱃길을 말하라!

공중으로 성난 바위들이 둥둥 떠다녔다
불가사리 모양의 새들이 불을 뿜으며 날아다니고
열두 가지 시간이 열두 방향으로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하얀 피를 바른 검은 글자族 전사들이
일제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현대시학》2008년 11월호

<함기석>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 동화『상상력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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